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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영 Nov 04. 2021

중절과 출산 사이, <십개월의 미래>

영화<십개월의 미래> 남궁선, 2021

임신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는 당장 머릿속에 떠올려보아도 떠오르지 않는다. 임신은 언제나 변방에서 이야기의 크고 작은 부분들로 사용되었을 뿐이다. 남궁선 감독은 우리에게 '부분'으로만 존재했던 이야기를 '중심'으로 끌어올리고 싶었던 것 같다.


영화는 숙취인 줄만 알고 약국에 간 주인공 미래가 임신임을 자각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남자 친구와 과음을 하고 잠을 잤는데 임신이 된 것이다. 이 영화는 임신에 대한 책임은 분명 스스로에게 있음에도 정말로 내 책임인지를 끊임없이 세상 사람들에게 되묻는다. 본인 책임을 왜 세상 책임으로 돌리냐고 하겠지만, 그냥 좀 세상 탓하면 안 되나. 중절을 선언할 수 없다면, 여성들의 하소연이라도 제대로 들어주면 안 되나. 어디 하나 미래의 하소연을 들어줄 구멍이 보이지 않는다.


세상은 미래의 말을 들어주기는커녕 그냥 이상한 사람 취급한다. 임신했다고 해서 미래라는 사람이 달라진 건 없는데, 미래는 여전히 미래인데, 임신으로 인해 변화하고 있는 상황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미래를 세상은 이상한 사람 취급한다. 세상에 원하는 임신만 있는 건 아닌데, 무조건 '엄마'라고 하면 이렇게만 해야 하고 저렇게만 가야 하는 법이라도 있는 것처럼, 세상은 미래의 것이 아닌 길로 미래를 움직인다.


"넌 엄마잖아!" 남자 친구 진호와 다투다가 진호 입에서 이런 말이 툭 튀어나온다. "너 방금 그 말 무슨 뜻이야? 무슨 뜻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엄마가 된다는 건 무엇일까. 설령 원하는 임신을 했다고 해도 임신, 출산, 육아로 인해 변화되는 환경이 당혹스러운 건 마찬가지다. 이 영화는 그런 의미에서 결혼, 비혼, 딩크, 임신중절, 출산을 고심하는 모든 여성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영화다.



스물아홉 살에 대기업을 때려치우고 스타트업에 뛰어든 미래. 그런 그녀에게 갑작스럽게 임신이라는 재난이 찾아온다. 이 영화 속에서 임신이 재난일 수밖에 없는 건, 배가 불러올수록 미래의 미래가 점점 일그러지기 때문이다. 단지 임신을 했을 뿐인데 미래가 다 쌓아 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프로젝트의 공로가 한순간에 무너지고 임신을 사유로 회사에서 퇴출되게 된다.


어느 순간, 미래에게 '임신' 해결해야  '문제' 되어있다. 사람 하나만 좋아도 괜찮았던 '연애' '결혼'으로 전환되면서 갑자기 '사랑' '족쇄' 된다. 채식주의자인 윤호가 결혼 준비로 무리하게 사업 준비를 하다가 유치장에 갇히게 되는데, 이를 해결해주는 조건으로 윤호는 부모님의 가업인 양돈업에 뛰어들게 된다. 채식주의자의 입에 억지로 돼지고기를 구겨 넣는 엄마. 채식주의자가 매일 돼지를 죽여야 한다니. 그들에게 찾아올 미래가 얼마나 우울하고 끔찍한가.


윤호의 어머니는 미래에게 앞치마를 선물하고, 윤호의 아버지는 이 둘에게 하던 일을 모두 내려놓고 지방으로 내려와 가업을 물려받아 가족만을 위해 살라고 한다. 부모님이 살았던 방식대로 자식들이 살아주기를 바라는 부모님. 미래의 부모님도 마찬가지다. 자신들이 살던 대로 살던지, 자신들이 못 해본 것을 대신해내며 살던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며 살라고 한다.



이 영화의 명랑은 독백처럼 뱉는 미래의 직설적인 대사에 있다.


"속았어, 온 세상이 날 속였어. 그래서 뭐 하나 투명한 게 없는 거야."

"임신을 왜 하고 싶은 거예요? 선생님 혹시 제가 사이코패스인가요?"


미래는 정말 궁금하다. 이 암울한 세상에 아이를 낳는 건 범죄 아니냐고 묻는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미래에게 온 진짜 재난은 임신 그 자체가 아니라, 임신으로 인해 '선택지가 사라지는 상황'이라고 보았다. 가족, 연인, 국가는 미래에게 다양한 선택지를 제시하지만, 그 선택지 안에는 어디에도 미래가 없다. 미래가 선택할 수 있는 거라곤 '낳을 것인가, 말 것인가'였는데 그마저도 불법이니 선택지다운 선택지라고 보기 어렵다.


지금이 저출산 시대인 건 생물학적인 불임 시대라서가 아니고, 사회적 불임 시대기 때문이다. 채식주의자인 윤호가 여전히 채식주의자로 살 수 있고, 미래가 상해로 갈 수 있다면 미래의 미래는 달라졌을까. 이 영화는 미래의 십 개월이 끝나며 막을 내린다. 십개월 뒷 이야기가 더 궁금해지는 영화였다. 미래는 미래를 잃지 않고 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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