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기영, <순이삼촌>
그 밭이서 죽은 사름들이 몽창몽창 썩어 거름 되연 이듬해엔 감저 농사는 참 잘되어서. 감저가 목침 덩어리만씩 큼직큼직해시니까 (P62)
그들은 가해자가 쉬쉬해서 삼십년 동안 각자의 어두운 가슴속에서만 갇힌 채 한번도 떳떳하게 햇빛을 못 본 원혼들이 해코지할까봐 두려웠다.(P86)
당신은 그때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다만 삼십년 전 그 옴팡밭에서 구구식 총구에서 나간 총알이 삼십년의 우여곡절한 유예를 보내고 오늘에야 당신의 가슴 한복판을 꿰뚫었을 뿐이었다.(P94)
2017년 봄, 오름이 좋아서 동부에 다랑쉬오름을 올랐어요. 하늬바람이 불어와서 눈을 따깝게해도 동쪽으로 보이는 성산과 하도리 바다가 그렇게 예뻐 보일 수 없었어요. 다랑쉬 오름에는 폐촌이 된 다랑쉬 마을이 있었어요. 거기서 얼마 안 떨어진 다랑쉬굴에서 아홉 살 어린이부터 50대 아주머니까지 11구의 주검들이 발견되었대요. 그때 그 좋았던 풍경이 깜깜해지는 거에요. 아뿔싸. 애월에 있는 예쁜 카페를 가보자. 갈치조림을 먹고 송악산에 가보자. 서귀포 천제연폭포를 가보자. 성산 일출봉에서 일출을 보자. 그동안 제가 갔던 모든 곳이 그 어떤 사건과 연결되어 있었어요. 아마 저만 모르고 있었나 봐요. 오지랖일 수도 있구요. 모른 척 지나갈 수도 있었어요. 맛집을 찾아다니면서 사진만 찍어도 모자랄 시간이니깐요. 그런데 그게 안 되더라구요.
오늘은 제72주년 제주 4.3 희생자 추념일이에요.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무려 7년에 거쳐 무장대와 경찰간의 충돌로 제주에서 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에요. 제주도에서 4.3사건과 관련 없는 곳을 찾는 것이 더 힘든 일이에요. 애월 방두리왓에는 50명의 사람이 사라졌구요. 송악산 섯알오름에서 132명의 사람이 사라졌어요. 천제연에서는 36명의 사람이 사라졌대요. 성산일출봉 터진목에서는 400명이 넘는 사람이 사라졌어요. 저녁밥을 준비하다 총소리가 요란하게 났는데 그게 남편이 총살당하는 소리라는 걸 알고 눈물이 쏟아져서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셨대요. 광치기해변에서 일출로로 쏟아지는 햇살이 퍽 아름다웠던 그곳이 70년 전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이유도 모른채 사라진 자리라는데. 그걸 듣고 어떻게 풍경이 눈에 들어오겠어요.
현기영의 <순이삼촌>은 이 사건을 최초로 고발한 작품이에요. 4.3 사건으로 3만 명, 제주도민의 1/10이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되었어요. 소설의 배경이 되는 제주도 북촌은 1,500여 명의 마을 인구 중 무려 500여 명이 희생된, 제주도에서 학살이 자행된 곳 중 가장 많은 사람이 희생된 곳이에요. 소설 속 순이삼촌은 북촌리 학살사건이 있었던 '옴팡밭'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이에요. 자식과 남편을 잃고 피해의식과 결벽증, 환청, 신경쇠약 등에 시달리며 꼬박 30년을 살아왔어요. 그런 사람이 돌연 자신이 살아나왔던 '옴팡밭'으로 들어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요. <순이삼촌>이 발표될 때만 해도 피해자들은 어떠한 신세 한탄도 공개적으로 허용되지 않았대요. <순이삼촌>은 금기시되었던 4.3이야기를 소설로 풀어냄으로써 진상조사의 물꼬를 튼 기념비적인 작품이에요. 2003년 노무현 정부에서 최초로 국가원수로서 사과했고, 2014년 박근혜 정부에서 4.3희생자 추념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했어요. 현기영 소설가는 단순히 자신이 제주도 태생의 작가라서 이 책을 쓴 것은 아닐 거에요. 그가 책을 쓴 이유는 제가 다랑쉬오름에서 느꼈던 죄책감과 같은 이유 때문 일거에요.
평화롭고 아름다운 제주에 그런 일 있었으리라고 어느 누가 생각했겠어요. 누군가에게는 평생 아픔이 되는 곳에서 숨겨진 이야기를 모른채 기쁨을 만끽한다는 게 부끄러웠어요. 그렇다고 영원히 죄책감을 가지자는 건 아니에요. 비극의 역사를 마주하는 일은 괴롭죠. 하지만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죄책감'을 '책임감'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왜냐면 내가 그 역사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에요. 4.3 사건을 알고부터 제주를 방문하면 북촌에 있는 '너븐숭이 기념관'을 먼저 찾아요. 북촌 주민들이 밭일을 하다가 돌아올 때 쉬어가던 넓은 팡이 있어서 '너분숭이'라고 불리운대요. 기념관 앞에 있는 20여기의 애기무덤에서 묵념을 하고 제주 일정을 시작해요. 그 가엾은 영혼들에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에요. 봄이 오면 애기무덤 주변에는 수선화가 펴있어요. 유채꽃보다 수선화가 보고 싶은 이유는 아마 그 때문일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