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솜허라.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by 김뜻뜻


IMG_6167.jpg 사진의 배경은 서울시립승화원의 유택동산이다. 유골을 뿌리는 곳. 떠난 이와 작별하는 곳.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은 오랫동안 분골함이 놓인 제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부터 다시 써, 진짜 작별인사를, 제대로 P25
무엇을 생각하면 견딜 수 있나. 가슴에 활활 일어나는 불이 없다면. 기어이 돌아가 껴안을 네가 없다면. P134


<소년이 온다>에서 1980년 봄을 기억한 것처럼 1948년의 겨울을 기억한 소설이다. 담백하게 읊조리는 문장들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시대의 비극을 견뎌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평범한 우리네 이야기다. 지극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문장이 쉽사리 읽히지 않는다. 머리가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진다. 쓰러진 나무들 사이로 검은 바다가 밀려오고 그곳에 고요히 누워있는 사람들을 발견한다. 작가는 기어이 돌아가 누운 사람들을 껴안는다. 그해 내린 눈이 녹아내리도록. 침묵하지 않도록 말이다.


고독사에 관한 책을 읽고 지난주 서울시립승화원을 방문했다. 죽음과 삶의 경계가 있는 공간. 누군가에게는 죽은 자를 기억하는 그리움의 공간이면서, 누군가에게는 산 자를 떠나보내는 고통의 공간인 승화원은 일요일에도 만원이었다. 검은색 운구 버스와 조문객을 실은 버스들이 주차장을 가득 메웠다. 구름 사이로 쏟아지는 눈부신 가을 햇살이 승화원의 하얀 콘크리트 건물을 비추는 것이 어딘가 어색해 보였다. 더없이 화창한 날. 사람들의 울음소리가 햇살을 뚫고 여기저기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1층 로비에 들어서자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비통한 표정으로 삼삼오오 모여있다. 슬픔이라는 감정을 가둔 댐이 있다면 이곳이 아닐까. 감정들을 헤치고 2층 계단을 올랐다. 복도 벽에는 '무연고 사망자의 존엄을 위해 마련한 공간'이라는 명패가 부착되어 있었다. 문이 반쯤 열린 403호실과 404호실은 소슬했다. 영정사진도 그 흔한 조화도 없는 곳. 회벽 천장에 비스듬히 부착된 모니터에 혼자 쓸쓸히 죽어간 사람의 이름만이, 얼마 전까지 세상에 존재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가 이름 세글자가 선명하게 박힌 모니터를 향해 묵념한다. 죽음의 공간에 잘 도달하시기를. 그곳에서 삶의 힘듦을 털어놓으시기를. 텅 빈 곳에서 생전 얼굴도 본 적 없는 사람을 위해 기도했다. 이상하게도 어떠한 위화감도 없었다. 오히려 제삼자의 시각에서 한 사람의 인생을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그제야 죽음이 뚜렷이 보이기 시작했다. 장례식장 때문일까. 검은 옷을 입은 사람 때문일까. 방을 나설 때 둘째 외삼촌이 떠났던 해로 시간과 장소가 옮겨가고 있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던 오후. 누나의 갑작스러운 연락이었다. 전화 너머로 다급함이 느껴졌다. 아뿔싸. 외삼촌의 죽음을 전해 들었을 때 어머니의 고통이 먼저 와닿았다. 동생들을 알뜰히 챙기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뒤로 돌아선 어머니의 등이 떨리는 모습도. 외삼촌의 관이 화장터로 들어갔다. 큰외삼촌은 둘째 외삼촌의 이름을 부르며 불이 뜨거우니 얼른 나오라고 소리를 질렀다. 어머니의 끝없는 울음은 심부를 찔렀다. 외삼촌은 속절없이 하얀 가루로 변해서 가족에게 전달되었다. 그렇게 둘째 외삼촌과 작별했다.


지난 추석. 외갓집 텃밭에 심은 고구마를 가져오기 위해 어머니를 태우고 운전대를 잡았다. 어머니는 동네에 있었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남쪽 아재가 밭에서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갔다는 이야기 등. 생각에 잠긴 듯 한참 동안 차창 밖을 바라보다 돌멩이에 발이 걸린 사람처럼 선득이며 말을 이었다. 거는 너무 춥다. 사람 살 때가 좋았제. 이젠 영 파이다. 페인트가 벗겨진 파란색 대문이 열리면, 투박한 손으로 뒷머리를 긁으며 머쓱한 웃음을 짓던 둘째 외삼촌. 어머니는 둘째 외삼촌과 작별하지 않았다.


이별과 작별의 차이는. 이별은 어찌할 수 없는 헤어짐이라면, 작별은 제 힘껏 헤어지는 것을 말한다. 예상할 수 없는 죽음은 예상치 못했던 이별을 동봉한다. 크게 들썩이는 어머니의 등이 보인다. 소설 속에서 요 아래 실톱을 놓은 여자도 보인다. 예리하게 벼린 칼 같은 기억에 생채기가 생겨도 그대로 둘 것이다. 작별하지 않으면 계속 만날 수 있다. 잊을 수 없다. 잊으면 안 된다. 이별할지언정 작별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들의 부재를. 나도 힘껏 헤어질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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