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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통 Jun 29. 2023

지금부터는 나의 읽음

<지금부터는 나의 입장>을 읽고





나는 내가 단 한 번도 깊은 슬픔에 빠져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별로 놀랍지 않다 모든 슬픔에서 반드시 기어 나왔다는 사실만큼은 - <얼굴 中>


우리는 구하지 마요 / 아름다워지도록 엉말으로 냅둬요 / 그늘이 더 예뻐요 / 울상이 좋아요 - <셔터스피드! 中>


나의 경험은 내내 잠들어 있습니다 다시는 일어날 마음이 없어보입니다 - <새로운 기쁨 中>


작년에 묘하게 유계영 시인의 책들과 얽힌 일이 유독 많았던 시즌이 있었다. 읽고 있던 책(꼭대기의 수줍음), 선물 받은 책(온갖 것들의 낮), 국제도서전에서 산 책(지금부터는 나의 입장) 어거지라면 어거지지만 이런 우연들이 참 좋다. 괜히 기억을 더 하게 되고.


다만 만남의 우연과는 별개로 읽은 후 정리하지도 않고, 내내 읽는 것을 미루기도 했는데, <호호호>와 마찬가지로, 국제도서전 전후로 읽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유계영 시집의 제목은 뭐랄까, 드립치기 좋은 제목들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얘기는 좀 어지러운가’가 특히 그랬었는데, 친구들이 뭐만하면 어지럽다 할 때 이 책을 태그로 보내기도 했었다.


그런 찐스러움, 그러니까, 지금부터는 나의 입장이다.


시집 속 이야기들은 어딘지 이해하기 어려운 구석을 가지거나, 자신만의 이야기를 구사한다. 그러니까 ‘나’의 이야기를 밝힌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이해받기 어려울 수도 있고, 완전히 반대된 의견을 구사하고, 슬픔이나 절망에 빠질 수도 있고, 혼자 웃을 수도 있지만 온전한 나를 표현하는 방식일 수도 있다.


자기 PR의 시대라는데, 그런 시대의 방향이 당당함이라면, 이 시집은 제목부터 지극히 트렌디한 느낌이다. 다만 이는 전문성의 당당함이라기보다는 감정의 당당함에 가깝다. 무언가를 소개할 때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를 보고 보통 당당하다고 말을 하지만, 이 시집 속의 감정은 자신감 넘치기보다는 찌질하고 부끄러운 부분에 대해서 덤덤히 이야기한다.


자기합리화보다 훨씬 더 깔끔하게. 표지가 하얀색인 이유는 그 깔끔함 때문이지 않을까, 제목이든, 시 내에서든 ‘지금부터는 나의 입장’이라는 단어를 볼 때마다 머리맡에 돌이 떨어진 듯 좀 가라앉게 되는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누군가가 ‘내 생각에는’이나 ‘나는’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는 보통 진심인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진심으로 말하는 사람이 ‘지금’ 진심으로 말한다고 생각하니 어조보다 그 속에 담긴 생각이 얼마나 깊을지 생각해보게 된다. 물론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많았지만, 그건 내 입장인 거고, 입장을 맘껏 말할 수 있으면 한다.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할 테니. 끝까지.


표현을 좀 빌리자면, 이런 것들을 읽는다는 건 확실하고 즐겁다(썩지 않는 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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