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회 한뫼이윤재선생 추모 글짓기 공모전 차상
소복이 눈 쌓인 골목길
가로등이 밝히 비춘다. 눈 쌓인 골목길을 걷는다. 누군가가 지나간 발자취를 따라 저벅저벅 딛는다. 길모퉁이에는 눈이 소복이 쌓였다. 지금 걷는 이 길만이 뚫려 있다. 쌓인 눈을 치우느라 고생했을 이에게 고마운 마음이 든다. 덕분에 미끄러지지 않고 눈길을 지나간다.
밤사이 눈이 계속해서 내렸다. 아침에 보면 또다시 말끔히 치워져 있다. 새벽에 누군가 골목길을 정돈했다. 넘어지지 않게 소금을 흩뿌려뒀다. 굵은 소금은 눈의 온몸을 녹인다. 언제 눈이 내렸냐는 듯 소금이 뿌려진 부분은 바닥을 내보인다. 소금이 뿌려지지 않은 곳은 건재한 탑이 됐다. 걷기 수월하게 사람이 다니는 길목만을 말끔히 치운다. 그 외엔 아이들이 눈 속을 뛰놀 수 있게 용인한다.
눈길 속에서 피어난 발자취를 따라 걸었다. 문득 과거의 어두웠던 시절이 생각난다. 지금의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선조들의 부단한 노력이 있었으리라. 새하얗게 쌓인 눈을 치울 이 하나 없어 길이 트여 있지 않았다. 앞길을 알 수 없는 시기였다.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길을 상실했다.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었다. 한 발을 내딛기 위해선 눈길을 개척해야 했다. 눈 쌓인 골목길에 발자국이 새겨졌다. 그 한 자취 발걸음이 뒤따르는 이들에겐 등대가 됐다. 한 걸음씩 걸어가며 길이 생겼다. 누군가의 첫걸음이 있었기에 눈이 계속해서 쌓이는 와중에 길이 만들어졌다. 그 길을 잇고 이어 꾸준히 걸어갔다. 마침내 길이 완성됐다.
골목길 구석구석 쌓인 눈을 밀어두며 길을 텄다. 뒤이어 걸어 올 사람들을 위해 제설 도구를 이용해 치웠다. 먼저 걸어갔던 이들이 터놓은 덕택에 골목길을 헤매지 않고 유유히 빠져나왔다. 골목길은 한 번 잘못 들면 빠져나가기 어렵다. 눈이 길을 덮으면 그야말로 골목길은 미로가 되고야 만다. 안내 표지판도 눈으로 가려져 어디가 어딘지 쉽게 찾지 못한다.
미로에 갇힌 조선을 구하기 위해 막혀있는 길을 열었다. 일제에 조선을 내어 주지 않으려면 한글을 사수해야 했다. 언어를 잃으면 나라를 다시 일으키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일제의 압박은 폭설이 되어 점차 우리 언어를 덮었다. 눈 속에 파묻혀 언어를 내어 줄 위기에 닥쳤다. 눈 때문에 가려진 한글을 끄집어낸 건 다름 아닌, 한뫼 이윤재 선생을 비롯한 국어학자와 독립운동가들이다.
국어학자는 일제에 미운털이 잔뜩 박혔다. 민족 말살 정책을 펼쳐 한민족의 정체성을 없애려 했던 일제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한글을 지킨다는 건 일제의 정책에 충돌하였을 뿐 아니라 완전히 반하는 행위였다. 그럼에도 한글을 사수하려던 건 민족의 정체성이 있어야 조선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일제는 민족을 지우기 위해 눈을 퍼부었다. 점차 조선은 눈 밑으로 묻혀갔다. 어느 나라도 조선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조선은 아무도 찾지 않는 작디작은 골목길 구석으로 내몰렸다. 오가는 이 없이 쓸쓸히, 점점 일제의 식민지화가 되어갔다.
눈이 계속해서 쌓여도 완전히 조선을 덮을 순 없었다. 치우는 이들이 있었다. 눈이 쌓이는 양엔 미치지 못하는 속도지만 묵묵히 눈을 치웠다. 언젠가 눈에서 끄집어낼 날을 기다리며 밀어내고 또 밀쳐냈다. 아쉽게도 손에 든 제설 도구가 형편없었다. 최신식도 아니고 기계식도 아니었다. 오로지 맨손 내지는 장갑 하나만 걸치고 손으로 치웠다. 한 사람 한 사람 치우는 이가 많아져 속도가 붙었다. 쌓이는 눈보다 치우는 눈이 많아졌다.
폭설이 내린 날, 하루종일 눈을 치운 적이 있다. 울릉도에 내린 폭설은 상상을 뛰어넘었다. 하루 적설량 100cm 이상 기록한 날이었다. 새벽 3시부터 시작한 제설 작업은 해가 뜰 때까지 이어졌다. 온종일 눈을 치워도 쌓이고 또 쌓였다. 제설차에 기대어 그나마 길을 터놓을 수 있었다. 제설차가 눈을 양옆으로 치워두면 뒤따르고 있다가 삽을 들고 길을 정돈했다. 뒤돌아보면 다시 눈이 누적됐다. 그냥 두면 제설차까지 발이 묶인다. 어느 정도 쌓이면 다시 제설차가 길을 뚫고 눈을 밀어냈다. 끊임없이 눈을 해치우며 길을 사수했다.
아침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며 밤새 눈을 치웠다. 다음 날, 해가 뜨고 마침내 눈이 녹았다. 치워둔 길의 표면은 약간의 햇볕으로도 충분히 눈이 녹아 없어질 수준이 됐다. 동트기 전 쓸어낸 덕분에 길이 막히지 않았다. 길옆에 쌓아 둔 눈은 해가 있어도 쉽사리 녹지 않았다.
독립만을 바랐던 암흑기엔 해가 언제 뜨는지조차 몰랐다. 그럼에도 기약없는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리며 계속해서 쌓인 눈을 걷어냈다. 큼지막한 제설차가 없어도, 제설 도구가 변변찮아도 내색하지 않고 눈을 쓸고 또 쓸었다. 기별없는 해를 고대하며 눈을 길에서 밀어냈다. 마침내 해가 떴다. 얇게 펼쳐진 길 위의 눈이 다 녹았다. 일제로부터 온전한 독립을 하게 됐다.
새벽녘, 가로등은 눈길을 치우는 이들을 밝히 비춰준다. 어두움에 침식되지 않게 일정한 간격으로 서 있는다. 골목길 구석구석 빛이 스며들도록 자리 잡는다. 가로등이 있어 밤길을 걷는 게 외롭지 않다. 가로등은 독립운동가들을 응원하는 조선인들의 마음이다. 조선을 되찾기를 간절히 바라고 원하는 염원이다. 모두가 독립을 갈망했지만, 일제가 두려워 대놓고 표출하진 못하던 이들은 독립운동가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며 밝히 비춰준다. 가로등이 있어 어두운 밤에도 눈을 치울 수 있다. 밤길을 걸어갈 수 있다.
칠흑 같은 어둠이 걷히고 마침내 해가 뜬다. 아침을 맞이한다. 골목길에 해가 환하게 들어온다. 골목 구석구석을 비춘다. 한결 밝아졌음에도 표지판이 없다면 미로처럼 어지러운 골목길을 빠져나가긴 힘들다. 한글이 적힌 표지판이 가야 할 길을 안내한다. 표지판이 없었더라면 골목길에 갇혔을 것이다. 한글을 빼앗기지 않아 천만다행이다.
한뫼 이윤재 선생은 한글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다. 우리 민족의 언어인 한글을 끝까지 지켜냈고 3·1운동을 주도했다. 함흥 감옥 독방에서 순국하는 그 순간까지 일생을 한글 교육과 독립을 위해 바쳤다. 한뫼 이윤재 선생은 조선어학회 상임 강사로 있으며 한글 보급에 힘썼다. 일제는 조선인들이 한글을 되찾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켰다. 조선어학회 회원 및 관련 인물들을 검거해 재판에 회부했다. 기소된 이들 중 이윤재 선생과 한징 선생이 그해 함흥 감옥에서 순국했다.
몸을 녹일 구석 하나 없는 감옥에서 생명의 불이 꺼졌다. 불쏘시개에 불을 옮겨주고 소산했다. 불쏘시개는 불을 옮겨받아 활활 타오르는 횃불이 됐다. 횃불은 샅샅이 골목길을 밝혔다. 한뫼 이윤재 선생이 전해 준 불 한 조각이 횃불이 되어 밤을 밝게 켰다. 횃불에 한 사람 한 사람 모여들었다. 마침내 모두가 한 손엔 횃불을, 다른 한 손엔 삽을 들고 눈을 치우는 작업에 임했다. 더 이상 밤에 침식되지 않았다. 횃불이 환하게 비췄다.
조선의 독립 깃발 아래 많은 이들이 모였다. 해방이란 목표를 향해 서로 손목을 꼭 붙들고 나아갔다. 1945년 8월 15일, 그토록 바라던 광복을 맞이했다. 한뫼 이윤재 선생은 독립을 목전에 두고 생을 마감했다. 해방을 맞이한 그 순간,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누구보다 기뻐했을 한뫼 이윤재 선생의 모습이 그려진다. “한 깃발 아래 모여 저기 보이는 한 목표를 향하여 서로 손목 잡고 나아가자.”라고 뜨겁게 외쳤던 목소리가 전해졌다. 소망이 이루어졌다.
소복이 눈 쌓인 골목길을 걷는다. 눈길이 치워져 있다. 가로등의 불빛이 밤이 자욱한 골목길을 비춘다. 표지판은 가야 할 방향을 알려준다. 모든 게 한데 어우러져 있다. 더 이상 골목길에서 헤맬 걱정 따위는 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