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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로케 Sep 03. 2023

인터넷 거북이 미학

지난주였나 지지난 주였나, 집 와이파이를 교체했다. 우리 집은 기계들에겐 저주받은 집으로.. 특이하게 내방과 오빠방에서 휴대폰 와이파이가 잘 잡히지 않는다. (그런데 또 웃긴 건 노트북 와이파이는 잘 잡힘) 그래서 갑자기 네이버에 접속이 안된다거나, 웹툰 이미지가 모두 엑박으로 나오거나, 플스 로딩이 유독 길어진다거나.. 여하튼 와이파이 문제를 겪던 중, 더 빠르고! 더 신속한!! 그런 걸로 교체를 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갑자기 뭐에 씌기라도 한 건지, 요금제를 변경해 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그 당시의 나는 '와이파이도 더 빠른 걸로 바꿨으니 더 이상 LTE를 쓸 일은 거의 없겠지?'라는 생각을 했고, 그 생각이 꼬리를 이어 어쨌든 주 2회 정도는 재택을 하고, 외부에서 LTE를 쓰는 건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음악을 듣거나, 웹툰, 뉴스 기사 정도 보는 거니 사용량이 별로 없겠지,라는 판단을 한 것 같다.


게다가 시력까지 저하됐는지 월평균 22.5G를 썼다고 앱에서 월별 수치를 확인했건만 22.5G를 2.5G로 보는 기적이 일어나 요금제를 정말로 2.5G 짜리로 변경했다는 거다. (기존엔 100G 짜리를 쓰고 있었고, 데이터를 납작하게 누른 덕에 요금은 2만 원 저렴해졌다.) 이것은 나의 큰 실수였다. 설상가상으로 요금제 변경과 동시에 적용이 된 건지 갑자기 남은 데이터가 부족하다고 알림이 떴다. 그래서 몇 백 메가로 속도를 제한한다나.. 어쨌다나 여하튼 그랬다. 


내 삶이 좀 달라졌다. 난 평소에 '빨리빨리'와는 거리가 좀 먼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나 보다. 음악을 들어보려면 계속해서 끊기고, 다음 음악으로 넘기는 것도 몇 초를 기다려야 했다. 답답하다. 말씀 앱을 시작하려면 일단 앱을 열고 1분 정도 멍 때리고 있어야 했다. 알뜰교통카드앱은 회사에서 와이파이 잡힐 때 키고 나가야 찍을 수 있을 정도였다. '못 참겠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어 요금제를 다시 원복 시키려 보니, 아뿔싸, 한 달 뒤에나 변경이 가능하단다. 당근을 나갔다가 채팅이 도통 오지 않아 답도 못 보낸 적이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 와이파이를 잡아보니 우르르 쏟아지더라.) 답답하다, 답답해. 이렇게 답답할 수가!


그런데 한 1.5주가 지나고 난 뒤, 이러한 인터넷 거북이 삶에도 미학이 생겼다. 일단, 회사 앱을 들어가지 않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너무 느려서 못 들어간다.) 그러니 퇴근 후에도 체크하던 이메일과는 자연히 멀어졌다. 그래, 너희들은 떠들어라, 나는 퇴근했고 이제 데이터 유목민이라 보지 못한다는 마음이다. 실제로 그렇기도 했고. 그리고 이동시간에 책을 읽거나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어쨌든 와이파이가 잘 잡히지 않는 공항철도나, 터널 안에서는 할 일이 없다. 요즘 가방 속 책이 짐처럼 느껴져 찜찜했는데, 휴대폰을 못 하니 책을 보게 됐다. 책도 읽기 싫으면 반대편 사람의 정수리를 보면서 멍 때리거나,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인터넷 거북이 미학이 점점 마음에 들었다. 오늘은 심지어 '이 현상을 조금 더 유지해 볼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요금제 변경까지는 적어도 3주 정도가 남았으니 그 때가서 천천히 결정해도 늦지 않을 거다. 그나저나 어제부터 음악이 빠르게 나오고, 음악 스킵도 빨라져서 '드디어 나도 거북이 생활에 익숙해진 건가!'했더니, 월초라 데이터가 들어온 거였다. 이런 사소한 빠름으로도 기뻐할 정도면 데이터를 원복 시키는 게 낫지 않나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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