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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로케 Oct 23. 2022

즐거움과 기쁨의 상실

9월 어느 수요일 오후, 한강에 갔다. 여차해서 방문한 한강은 생각보다 와우 포인트가 적었지만, 아직도 낯선 도시 서울에서 강을 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생각해 보니 의외의 와우 포인트는 6시 전에 갔음에도 사람들이 이미 빼곡하게 있었다는 점과, 온갖 음식물 냄새가 심하게 뒤섞여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평소 건강해 보였던 친구가 병가를 냈다. 생각해 보니 병가는 대부분 의외의 사람들이 갔는데, '겉만 보고 사람 판단하지 마라'라는 오래된 말은 내게 다른 의미로 쓰이기 시작했다. (대부분 병가 가는 친구들은 표면적으론 좋아 보였다. 혈색도 좋고.) 어쨌든 그 친구와 종종 시간을 보내는 도중에 나온 병가의 목표와 포부를 듣다가 눈이 번쩍 뜨였다.


"제가요. 사실은 웃음도 참 많고 재미있는 사람인데...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네요. 사실은 산에 가는 것도 좋아하고 그런데, 요새는 뭘 해도 하나도 즐겁지가 않아요. 예전에 했던 것도 하나도 즐겁지가 않아요. 병가 동안 몸과 마음을 추슬러서 즐거움과 기쁨을 찾아올게요."


즐거움과 기쁨의 상실. 이 문제는 그 친구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도 그랬다. 이전에 이력서를 쓰다, '어떤 브랜드를 좋아하냐?'라는 질문에 헉! 숨이 턱 막힌 적이 있었다. 막연했다. 예전 같았으면, 나는 이 브랜드가 좋고, 이래서 좋고, 이 행보가 좋니 마니 쫑알거렸을 나인데, 이제는 모든 게 무감각해졌다. 사람이 거의 없는 토요일 이른 오전에 아이스커피를 들고 보는 영화도 이젠 설레지 않다. 영화 보는 취미는 거의 10년 이상 지속된 취미였는데 더 이상 내게 설렘을 주지 않는다. 우표를 구하겠다고 세계의 사람들에게 메일을 보내던 열정도 없다. 아, 마음의 병은 내게 있는 거 아닌가? 친구의 포부를 듣고 나도 모르게 '나도 그런데'라는 말을 남겼다.


지난 일요일 방 정리를 시작했다. 방이 지저분해서 좀 더 깨끗한 환경에서 지내보자는 결심이 들었다. 하루에 다 정리하려고 하면 금세 흥미를 잃으니, 구역을 나눠 한 달간 정리하기로 했다. 그날은 '책장 정리'의 날이었다. 영문과와 무역학과 책 몇 개가 아직도 있었다. 보지도 않을 것들을 왜 보관하고 있었을까? 내다 버렸다. 속이 시원했다. 보관할 책들을 닦다가 우연히 서류 봉투를 발견했다. 열어보니 새 우표가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우체국에 정기구독 신청했던 우표들이었다. 카카오 우표부터 이런저런 테마 우표들.. 마음이 동요했다.


사실 내 오랜 취미는 우표와 엽서 모으기였다. 이 분야에는 광기가 넘쳐흘렀는데, 해외에 엽서를 보내고 해외 우표까지 모으는 취미가 생기고서는 우표 카페에 가입해 카페 활동도 했고, 지역 축제 소인을 찍으려 홀로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도 했다. 심지어 국내여행을 가서도 며칠 중 하루는 꼭 우체국에 들러 스페셜 소인을 찍기도 했다. 그런 열정이 입사와 동시에 사라졌다. 정말 신기하게도 구멍 뚫린 풍선처럼 열정이라는 녀석에서 모든 김이 빠졌다. 좋은 게 없었다. 나는 기쁨을 상실했다. 상실된 기쁨과 함께 작은 것에도 좋아하고 기뻐하던 내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왜 기쁨을 잃어버렸을까? 나는 요즘 뭘 할 때 즐겁나? 단순히 일을 떠나서,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읽다가, 내 상태가 가벼운 우울 증상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회사 동료가 떠나고 나는 혼자 생각했다. '그 병가 말이야, 나도 필요한 것 같아. 사실 나는 병가는 필요 없어. 나는 기쁨을 되찾을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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