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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okyoulovearchive Dec 28. 2023

정현우, 소멸하는 밤

현대문학핀시리즈 시인선 044 (231219~231228)



*별점: 4.5

*한줄평: 소멸은 슬프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

*키워드: 마음 | 기다림 | 겨울 | 눈 | 밤 | 죽음 | 슬픔 | 울음 | 기도 | 꿈 | 사랑 | 엄마

*추천: 겨울밤의 슬픔이 가득한 시집을 읽고 싶은 사람


어떤 슬픔은 머무르는 그대로 우리를 살게 하고,
그대로 내버려두고 싶은 슬픔이 있어,
/ 「소멸하는 밤」 (p.25)


* 출판사 서평을 읽다가 시인이 ‘소멸’에는 ‘사라져 없어짐’이라는 의미뿐 아니라 ‘에너지가 합쳐져 다른 형태의 에너지를 내보내는 의미’도 있다고 말했다기에 사전을 찾아보았다. ‘소멸’에 ‘반입자(反粒子)와 소립자(素粒子)가 합체해서, 그 정지(靜止) 에너지를 다른 입자의 형태로 방출하는 과정’이라는 의미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랑하는 존재가 ‘사라져 없어진다’는 것은 다르게 생각하면 ‘다른 형태로 모습을 바꾸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 훗날 상실의 아픔을 겪고 슬픔의 시간을 지나가게 될 때 이 시집을 읽었던 일이 떠오르면 좋겠다.


* 밤, 그리고 겨울. 뭔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기나긴 기다림이 떠오르는 시간이다. 시집을 읽으며 겨울밤의 이미지가 계속 떠올랐다. 누군가를 애도하는 과정도 그러하지 않을까.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기나긴 슬픔. 차갑고 매서운 눈바람이 꽁꽁 얼어붙게 만들어 쉽사리 녹을 것 같지 않은 마음. 그리워했던 사랑하는 이를 꿈에서라도 만나게 될 때 영원히 깨어나고 싶지 않은 순간.


* 그렇지만 ‘어떤 슬픔은 머무르는 그대로 우리를 살게’(「소멸하는 밤」) 해서 ‘그대로 내버려두고 싶’(「소멸하는 밤」)기도 한 것이다. 프로이트의 애도가 대상의 상실을 받아들이고 떠나보내는 것이라면, 데리다의 애도는 대상을 영원히 기억하고 슬퍼하는 것이라는 문장을 본 적이 있다. 슬픔이 계속 남아 있기 때문에 애도는 끝나지 않고, 또 불가능한 것이 된다. 슬픔이 머무르는 게 꼭 아픈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랑했던, 사랑하는 이를 영원히 기억하고 슬퍼하는 게 애도라면, 그 기억과 슬픔은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 될 수도 있으니까.


* 시인의 에세이 「슬픔의 반려」에서도 할머니께서 “모든 슬픔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라고 말씀하시는 부분이 나온다. 슬픔의 반려(伴侶)는 무엇일까. 언젠가 슬픔을 반려(返戾)하는 날이 오기도 할까.


* 당신은 어떤 것이 ‘소멸하는 밤’을 보내게 될까. 겨울 내내 곱씹어 보고 싶은 그런 시집이었다. [23/12/28]


———······———······———


| 잘 가, 라는 말 대신 차오르고 마는 강수, 슬픔이 표정을 지을 수 있다면 네 눈빛을 하고, 빈 의자에 앉아 창가를 보는 사람이 너라는 것을 나는 안다. 나열할 수 없는 슬픔은 왜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걸까, 모든 비는, 두 눈은,

/ 「스콜」 (p.21-22)


| 잘 지내? 너무 먼 그곳,

  여기 겨울 볕이 좋아,

  이건 나 혼자 오래된 이야기.

/ 「물끄러미」 (p.47)


| 마음은 떠나도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데

  마음을 가진 인간은 왜 돌아오지 못하지

/ 「민들레」 (p.65)


| 사라지는 것들의 소리를 듣고 있다는 일이 경이롭지 않나요.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지 않나요, 꿈 곁을 들어 올리면 내일 꾸어야 할 꿈들이 빛을 향한다, 꿈속에는 빛이 없으면서, 당신은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면서.

/ 「하모니카」 (p.108-109)


| “모든 슬픔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나를 더는 못 보더라도 슬퍼하지 마.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

  모든 슬픔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니. 기억난다. 지금까지도. 모든 슬픔이 사라지는 순간이. 촛불이 더 이상 타들어갈 수 없다는 듯이 흔들리는 심지가. 할머니의 꺼져가는 동공 위에 비치는 울고 있는 엄마의 얼굴과 멈칫거리는 내 모습이. 작아진 할머니의 몸을 엄마와 함께 들었을 때, 이리 가벼울 수 있을까. 죽음이 이리 가벼울 수 있구나. 이미 할머니의 몸에서 마음이 떠나갔음을 엄마와 나는 알았다. 밤의 궁전으로 우리를 데려가고 있음을.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가 저 어둠의 궁전으로 우리를 들여보내주지 않을 것임을. 다시는 열어보고 싶지 않은 상자들이 쌓였다. 상자 속에 들어가는 죽음이라니, 이토록 간단하다니, 나의 할머니와 반려동물들은 하나같이 상자 속에 들어갔다. 그래. 묻기 쉬우라고.

/ 에세이: 「슬픔의 반려」 (p.136-137)


| 꿈에서 깨었을 때 베갯잇이 눈물로 젖어 있었다. 눈물은 신이 인간에게 슬플 때 춥지 말라고 주는 무엇일까. 눈물을 흘리고 나면 두 눈이 따뜻해지니까, 더는 춥지 말라고, 슬픔에 얼어붙어 있지 말라고.

/ 에세이: 「슬픔의 반려」 (p.139)


———······———······———


*좋았던 시


1부

 「너는 모른다」

 「스콜」

 「소멸하는 밤」

 「피에타」

 「물끄러미」


2부

 「수국」

 「기일」

 「빛의 다락」

 「민들레」

 「몫」

 「조감도」

 「윈터링」

 「광합성」


3부

 「오목」

 「하모니카」

 「파종」

 「겨울의 연서」

 「앵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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