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지나간다

by 서한나

채니의 겨울방학 마지막 날. 방학은 3살짜리 아기도 들뜨게 하나보다. 방학기간 내내 아침 7시에 일어나는 채니. 평소에는 9시쯤 일어나서 어린이집에 가는데 말이다. 일어나자마자 거실에 나와 기찻길을 만든다. 나에게 기차 바구니를 내려달라고 해서 거실 매트 위에 놓아줬다. 어린이날 기차놀이 장난감을 선물받았다. 그때는 기차나 굴릴 줄 알았다. 지금은 블록을 연결해서 길을 만들고, 제법 놀이도 한다. 장난감 바구니를 거실 바닥에 그대로 엎었다. 비가 내린다고 말하면서 떨어지는 블록들을 보고 좋아한다.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레일을 만든다. 나보고 도와달라고 하길래, 혼자 해보라고 말했다. 입을 삐쭉 내밀더니, 기찻길 블록을 집어 들고 하나씩 연결했다. 매트 하나의 절반 정도를 기찻길로 둘렀다. 기차역도 짓고, 여기는 바다라고 나에게 말도 한다. 나는 채니 옆에 앉아서 우와 멋지다만 연신 남발했다.


채니가 집중하길래, 옆에서 좀 있다가 아침 식사한 설거지를 했다. 설거지를 마치고 다시 채니 옆으로 갔다. 기차도 몇 개 고르더니 나에게도 하나 주면서 같이 하자고 한다. 나는 채니가 주는 기차를 받고 채니 옆에 앉았다. 레일을 따라서 기차를 움직이고, 채니의 행동을 따라 했다. 채니는 띠띠뽀띠띠뽀라는 기차 만화에서 나오는 대사들을 얼핏 따라 하는 거 같았다. 나도 채니 옆에서 얼추 주워들었던 걸로 대화를 하면서 놀이를 했다.


한창 채니랑 놀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저장은 되어 있지 않지만, 요즘 자주 통화해서 누군지 안다.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왜 전화가 왔지 싶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상대방 목소리가 들린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설명한다. 말하지 않아도 이제는 아는데 말이지. 계약서에 도장을 찍어야 하는데 와줄 수 있냐고 했다. 우리 집에서 230km 거리다. 갈 수 없지 당연히. 집에서 애보고 있는데.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숨소리도 거칠어지려고 해서 입을 앙다물었다. 호흡을 깊게 하려고 속으로 숫자를 셌다. 담당자와 상의하라는 이야기를 하길래 알았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아는 교수님이 부탁을 해왔다. 내용을 들어보니 별거 아닌 거 같았다. 충분히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이 됐다. 내가 제출해야 될 서류들이 있어서 준비해서 제출했다. 서류가 일부 보완이 필요했는데, 조교는 검토하지 않았다. 마감날이 되어서야 검토를 했고, 교수님이 다급하게 전화가 왔다. 오늘까지 내용이 보완되지 않는다면, 사업 진행이 어려울 것이라는 것. 나도 도와주기로 한 터니, 사업 진행이 안되면 의미가 없었다. 서류 준비해서 보내고 등기로도 발송했었다. 사업 관련해서 계약이 필요했었던 터. 절차상 필요한 것을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미리 준비해서 이야기해 주면 조정할 수 있는 것들을 당일에 이야기하니, 순조롭지 못한 게 찝찝하고 마음에 걸렸다.


통화하는 중에도 채니는 옆에서 계속 나에게 기차를 하라며 소리를 질렀다. 자기에게 집중하지 않고, 통화를 한다며 전화를 끊으라고 아우성인 채니. 조교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통화를 마쳤다. 다시 기차놀이는 시작됐다. 레일 위를 기차를 들고 돌면서, 띠띠뽀 놀이를 했다.




남편 생일이다. 저녁에 식사를 어떻게 할까 싶어 남편에게 카톡을 보내뒀다. 남편이 전화가 왔다. 회사 사모님 어머니가 돌아가실 것 같다는 거다. 사모님 어머니는 지병이 있으셔서 요양병원에 계셨다. 90세가 넘으신 나이. 얼마 전 연명치료를 하지 않겠다는 동의를 한 걸로 들었는데. 돌아가실 수도 있다는 소식이었다. 저녁에 장례식장에 가야 할 것 같다며, 같이 가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나는 같이 가도 괜찮다고 했다. 남편은 상황을 이따 보고 이야기해야 할 거 같다며 전화를 끊었다.


교수님과 통화를 하던 중 조교가 전화를 와서 받지 못했다. 다시 전화를 했더니, 이번엔 조교가 받지 않았다. 좀 있으니 카톡이 왔다. 내가 보낸 등기가 누락이 된 거 같다고. 교수님 만날 때 서류를 전달해달라고. 나는 물었다 무슨 서류냐고. 좀 세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히 우체국에서 등기가 잘 전달됐다는 카톡도 받았는데. 서류가 없어졌단다. 담당자는 받지 못했고. 자기도 듣는 거라 서류 상태를 알 수 없다고 했다.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한숨이 나왔다. 인감증명서, 주민등록증, 등본 등 개인정보가 많은 서류이기도 하고, 그랬기 때문에 등기로 보낸 건데. 행방을 알 수 없다니. 마른 세수를 했다. 뭐 없어졌다는데 어쩌겠는가. 다시 준비해서 보낸다고 했다.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 잘잘못을 따지는 게 의미가 없으니까.




남편이 전화 왔다. 집에 거의 다 와간다고. 장례식장으로 바로 출발하기로 했다. 남편 오는 시간에 맞춰 출발할 수 있게 준비를 했다. 채니와 같이 옷을 입었다. 남편 차가 들어왔다는 알람이 떴다. 남편과 함께 장례식장으로 갔다. 올겨울 가장 추운 날이라더니, 차에서 내리자마자 찬 기운이 돌아 몸이 떨렸다. 잠바를 입지 않겠다고 고집피우던 채니도 춥다며 어깨를 들어 올렸다. 채니에게 잠바를 덮어서 장례식장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안 바람은 더 이상 불지 않지만, 어딘가 서늘한 기분이다. 사람들이 홀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장례식장 호실마다 꽉 차있었다. 로비에서 호실을 확인하고 지하로 내려갔다. 들어가려는 문 앞에 상복을 입은 젊은 여성이 있었다. 나와 비슷한 연배. 알고 보니 남편 친구 아내였다. 아 남편은 회사 사장은 남편 친구 아버지다. 인사를 하고 들어갔다. 남편만 절하러 들어가고, 나와 채니는 밖에 있었다. 채니가 어리기도 하고, 신발을 벗고 들어가고 나오고 하는 게 불편할 거 같아서. 남편 회사 사람들은 먼저 와있었다. 인사하고 나왔더니 식사하는 곳에 앉아 있어 우리도 그 옆에 자리를 잡았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 생일에, 사모님 어머니는 돌아가셨다고. 누군가는 태어나서 기쁜 날인데, 죽음으로 슬퍼하는 날이기도 하다고. 양면성을 가졌다는 것을 몰라서가 아니라,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집에 돌아온 우리, 케이크에 불을 붙였다. 채니와 함께 노래를 부르고 촛불을 껐다. 남편의 생일을 축하했다. 케이크를 한 조각 먹더니 채니는 그만 먹겠다고 했다. 자기 입맛이 아니었나 보다. 평소에는 케이크를 좋아하는 편인데 말이다.


거실에 치워두지 않았던 흔적이 그대로 있다. 식탁에서 뒤를 돌아 거실을 보더니 채니는 자기가 만들어 놓은 기찻길로 달려갔다. 기차를 하나 집어 들더니 레일을 따라서 기차를 움직였다. 오늘 낮, 조교가 받지 못한 등기는 여전히 행방을 알 수 없다. 남편 회사 사모님은 어머니를 여의었다. 남편은 한 살을 더 먹었다. 채니가 손에 쥔 기차는 여전히 레일을 돌고 있다. 길이 있으나 무엇이 나올지는 알 수 없다. 슬픔도, 기쁨도, 당혹감도 모두 그 길 위에 있다. 그저 지나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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