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에는 떼가 있다. 그때의 나는 가능하고 그러했다.
Harlem(할렘)은 뉴욕에 오기 전부터 내가 알고 있던 몇 안 되는 미국의 지명이었다. 그도 그럴 것은 한국에서 시청한 미국 영화 곳곳에 할렘의 모습이 나오기 때문인데, 주로 범죄 영화이긴 했지만 그렇게 위험하면서 뭔가 할렘에 가면 영화 속 주인공이 될듯한 느낌으로 다가왔던 곳이었다. 특히 브루스 윌리스 주연의 다이하드에서 인상 깊게? 다가왔기 때문에 기억이 생생했다. 나에게 할렘이라는 곳은 그런 곳이었다. 뜨거운 곳이었다.
뉴욕의 겨울은 몹시 춥다. 한국만큼 추운데, 온도야 비슷할 것 같지만 체감하는 추위만큼은 춥다 못해 시리다. 아마 해외에서 거주하는 분들은 비슷한 감정이 들 수도 있는데 우리나라가 아니다 보니 외국인 신분으로써는 더 춥게만 느껴지는 겨울이었다. 심리적으로 우리나라가 더 따듯하고 좋다. 여하튼 뉴욕의 겨울이 적응도 되지 않았을 무렵 당시 회사 신입이었던 나는 할렘으로 출장을 가게 되는데, 부장은 나에게 그곳에 가서 할 일이 있으니 오늘 같이 가보자고 했다. 부장의 차를 타고 맨해튼 다리를 건너서 그렇게 나는 다이하드 속 할렘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할렘의 중심은 125th이다. 그곳으로 들어가면서 나는 부장에게 "여기에서 할 일이 무엇인가요?"라고 물었고 이어서 "뭐든 시켜만 주신다면야 뭐든 열심히 하겠습니다!" 라며 나름 신입의 밑도 끝도 없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나의 씩씩한 포부에 부장은 피식 웃으면서 "할렘에서 며칠 뒤 Flea Market 이 열리는데 이곳에 우리 Booth를 마련해놨거든 그곳에서 이번에 우리가 개발한 Flat Iron을 판매해봐 많이 판매할수록 좋긴 한데 큰 기대는 안 한다." 라며 부장은 큰 기대는 안 한다면서도 내심 뭔가를 보여줘 봐라!라는 식의 알 수 없는 부장 특유의 입꼬리가 약간 올라간 느끼한 표정을 지었다.
부장에게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을 보였던 나는 그날 피곤한 Harlem의 일정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미국 특유의 주황색 불빛이 비추는 조그마한 내 방에 누워 빼곡하게도 칠이 잘된 내 방 하얀 페인트 천장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내 몸은 그날 오전의 긴장이 풀렸는지 약간 잠이 오면서 별의별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휘젓고 다니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날씨가 너무 춥기 때문에 Flea Market이 안 열리지 않을까?" "그럼 안 해도 되겠지?" "만약 열리면 할렘 같은 무시무시하고 거친 곳에서 내가 과연 잘할 수 있을까?" "입이라도 뻥끗할 수 있을까? 아니지 아니지, 놀러 가는 게 아닌데 입만 뻥긋해서는 아니고 실적을 보여줘야 되잖아! 큰일 났네" 라며 오늘 오전 자신 있어하던 내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어두운 밤이 찾아오자 허세의 자신감 껍질 속에 불안해하던 벌거숭이 신입 본연의 모습이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었다. 지금도 확실히 기억나는 건 그날의 밤은 깊었고 길었다.
다음날 아침 내 걱정을 오히려 비웃기라도 하듯 모처럼 해가 쨍쨍한 날이 찾아왔다. 그야말로 누가 봐도 Flea Market 하기 딱 좋은 날씨였다! 모처럼만에 약간 따스한 날씨라 행사장에 사람도 더 많이 찾아올 것만 같은 느낌적인 느낌! 불안한 느낌이었다. 이 불안은 Harlem 125th의 행사장에 도착하자 나에게 확신으로 다가왔는데 마치 모두 그날을 기다리기라도 하듯이 아침부터 사람들은 바글거렸고 Booth의 사람들은 다들 준비하느라 바빠 보였다. 우리 Booth에는 나 말고 할렘 토박이? 젊은 청년 Mussa 가 나와있었는데 키는 한 190 정도 될 것 같은 흑인이었던 그는 순박한 인상이면서도 한번 화가 나면 굉장히 무서울듯한 느낌의 굵은 선이 인상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와 초면이었기에 간단한 어색한 인사로 시작했으나 "Hi, How are you? my name is..." 그러나 그는 뭔가 싸늘했다. "..." 소개팅에서 처음 만났는데 상대가 마음에 안 드는 것 같은 그런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들의 Flea Market은 시작되었다.
시작한 지 30분 동안 Mussa와 나는 입도 뻥긋하지 않고 있었다. 도무지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할렘 125가의 Flea Market에서 동양인인 나는 어떻게 영업해야 우리 브랜드의 Flat Iron을 판매할 수 있을지... 손님을 어떻게 끌고 들어와야 할지 전혀 감이 안 왔다. 이럴 때 Mussa가 리드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에 물끄러미 옆에 Mussa를 보니 큰 덩치에 뭐든지 척척 해낼 것 같은 Mussa는 어찌 된 영문인지 나와 마찬가지로 아니 어쩌면 나보다 더 조용하고 어두운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있었다. 내가 손님이라도 Mussa에게 사고 싶지 않을 것 같았다. 아마 내 모습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2시간이 흘렀다. 물어본 손님은 많았으나 둘 다 쭈뼛쭈뼛하고 적극적이지 않았던 게 문제였는지 PL 브랜드였던 우리의 Flat Iron의 판매 수량은 0개였다. 나는 도망치고 싶었고, 입은 바짝바짝 말라갔다. 아마 Mussa의 마음도 마찬가지였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대로는 도저히 오후 6시에 부장에게 보고할 수가 없겠다 라고 생각한 나는,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잘리기 싫었던 나는 Mussa에게 왜 적극적이지 않는지 물어봤다." 그에게서 의외의 대답이면서 어찌 보면 우리 모두의 대답일 것 같은 대답을 얻었는데 Mussa는 "여기는 내 동네야, 여기에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오히려 창피해, Flat Iron은 여자들 제품인데 내가 Flea Market에서 이러고 있는 것을 알면 친구들이 놀릴 거야" 솔직한 이야기를 해줬고 이어서 "그래도 한 개도 못 팔면 나도 입장이 곤란해 그러니 네가 열심히 팔아주면 좋겠어" 라며 내심 걱정인 마음을 비추었다.
우리 모두 같은 마음이었던 것이다. 나는 하기 싫은데 네가 해줬으면 하는 모습, 인간의 이런 이기적인 모습은 국적을 불문하고 인종을 불문하고 똑같이 찾아오나 보다. 나는 Mussa에게 "이래서는 우리 둘 다 곤란해, 내가 먼저 소리칠 테니 너도 소리쳐! 우리 회사에서 잘리면 안 되잖아,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고 생각해 지금은 다른 것 생각하지 말고 Flat Iron 많이 판매하는 것에 집중하자! 오늘 100개 끝내버리자! 내가 먼저 소리칠게 도와줘"라고 이야기했고 정말 살기 위해 나는 우리의 프로모션 가격이었던 $29.99을 소리치기 시작했다. "Just today $29.99" "Only today"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공격적이게 들렸을 정도로 눈감고 크게 소리쳤다. 그렇게 Harlem 125가 Flea Market Booth에서 유일한 동양인이었던 나는 그들이 보기에 동양 꼬마인 나는 그렇게 살기 위해 목청을 높였다.
그날 우리는 77개의 Flat Iron을 판매했습니다. 오후 6시 부장에게 보고했고 부장은 정말 놀라워했습니다. 나는 그날 이후 Mussa와 수년간을 우정을 쌓았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판매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소리치자, 무사는 Flat Iron을 양손에 들고 얼굴은 약간 상기된 채 위아래로 흔들어 댔기 때문이었습니다. 키 190 건장한 흑인 젊은 청년이 긴 두 팔에 Flat Iron을 흔들고 있고 옆에는 동양 꼬마가 싸우자는 식으로 세일 가격을 소리치고 있었으니 꽤 재미있었나 봅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습니다. 그날 Mussa와 저는 그때, 기회를 잡았습니다. 글을 읽는 여러분도 지금 하고 싶은 것, 해야 할 일을 놓치지 마세요. 미루지 말고 당장 하세요. 때때로 우리의 삶은 신물 날만큼 힘들지만 그래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한 사람들은 그 경험이 큰 용기가 되어 신물 나는 삶도 달콤하게 삼킬 수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