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빛 그리움

by 보라
그리움은 비 내리는 도시에서 더 짙어진다.


오늘의 계절은
낙엽이 뒹구는 가을의 끝,
아니 어쩌면 하얀 눈이 내릴지도 모를 겨울의 초입입니다.

가을은 저만치 물러나고,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옷차림엔
이미 겨울이 스며 있습니다.

차가워진 바람은
바닥의 낙엽을 뱅글뱅글 돌게 하고,
감빛으로 물든 풍경에게
“이제 그만”이라며 작별을 고합니다.

그에 따라,
나뭇잎은 또 하나둘, 바람을 타고 떨어집니다.

늦가을의 정취는
언제나 쓸쓸하고, 안타깝고, 애잔합니다.

오늘은 조금 일찍 퇴근한 덕에
평일의 귀한 시간을 전시회 관람으로 채웠습니다.

작품의 여운을 안고
가을빛 거리를 달려 집에 도착했는데,
평소보다 일찍 도착한 집이
왠지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햇빛이 막 지나간 듯 따뜻한 거실,
햇살을 가득 품은 안방,
평일 오후에만 맡을 수 있는 독특한 공기 내음.

그리고
오롯이 나를 위해 보내는
혼자만의 시간.

익숙하지 않아서였을까요.
그 모든 것이 낯설었습니다.

잠시 후,
가을 저녁 하늘엔 어둠이 내려앉고,
방 안을 채우던 빛도
서서히 자리를 내줍니다.

소파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다,
무심코 시애틀을 떠올렸습니다.

눈보다는 비가 어울리는 도시,
봄보다는 가을이 더 어울리는 곳.
화사함보다는 쓸쓸함이 어울리는 장소들.

몇 년 전, 이맘때
시애틀을 여행했습니다.

바닥에 뒹구는 낙엽,
먹구름 낀 하늘,
종일 내리던 비와
그 속을 걷는 나.

옷깃을 여미고
우산을 받쳐 들고
차가운 거리 곳곳을 걸었습니다.

예고도 없이 찾아온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미드 ‘The Killing’을 꺼내 보았습니다.

시애틀을 배경으로 한 이 드라마는
흐린 하늘과 비, 회색빛의 분위기를 그려냅니다.

형사 새라와 홀더,
그리고 피해자 로지의 가족들,
그 모든 인물의 표정과 감정은
묵직하고 음울한 시애틀의 날씨와 닮아 있습니다.

무작정 시애틀이 그리워 틀어놓은 ‘The Killing’.
로지 부모님의 슬픔에
결국 나도 울고 맙니다.

그렇게 도시 하나가
감정을 통째로 불러오기도 하죠.

도시가 그리운 날엔
방어막처럼 쌓아둔 해법들을 꺼냅니다.

드라마를 보며 감상에 젖고,
그 시절의 사진을 꺼내어
그리움을 곱씹습니다.

잡을 수 없는 시간,
돌아갈 수 없는 지난날,
거부할 수 없는 다음 계절.

그저,
추억을 되새기고
지금을 즐기며
다음 계절을 맞이할 준비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