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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람 Oct 07. 2021

늙은 호박


얼마 전 어머님이 늙은 호박 하나, 초록 호박 하나를 가져다주셨다.

가을이니 아이들과 호박 보며 가을을 즐기면 좋을 거라고 아버님이 손수 따다 주셨다고 했다.

 그래 9 말부터 올해 핼러윈은 어떻게 보낼지 고민했는데 호박 하나로 핼러윈이 성큼 다가온 느낌이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핼러윈데이는 좀 생소하고,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내겐 의미 없는 날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성장할수록 아쉬운 마음에 크고 작은 이벤트에 나도 모르게 열정이 생긴다.

한 해가 다르게 쑥쑥 커가는 아이들을 보며 엄마의 소꿉놀이가 끝나버릴 것 같은 불안감에.


재작년에는 동네 친구들과 원데이 클래스, 작년에는 집에서 단출하게 사진 찍고 과자파티 정도 했는데, 매년 욕심이 더 생기는 것 같다.

올해는 진짜 호박농장이라도 가보고 싶었는데, 아버님이 가져다주신 호박으로 아이디어가 퐁퐁 솟는다.


선물 받은 호박으로 아이들과 그림도 그리고 사진도 찍고 잭 오 렌턴도 만들었다.

오며 가며 구경하고 어떻게 더 활용하면 좋을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통풍이 잘 안됐는지 살짝 상한 거 같길래 급한 마음에 호박 다듬기를 시작했다.


평소 애호박은 떨어질 새 없이 사다 놓고 먹는 편인데, 늙은 호박은 참 낯설다.

제주에선 늙은 호박도 반찬거리로 국거리고 참 많이 쓰인다.

그렇게 흔하디 흔한 호박인데. 먹을 줄만 알지 다듬는 방법도 요리법도 모르고 7년 차 주부가 되었더랬다.


1남 2녀 중 맏이로 태어났지만, 집안일은 형편없었던 나.

우연인지 운명인지 모를 첫 직장에서의 의도치 않은 보직변경으로 생활재활교사로 일하게 되었을 때 나는 세탁기 돌리는 것부터, 빨래 개키는 법까지 새롭게 배웠을 정도였으니 지금의 나는 정말 용 됐구나 싶다.

그렇게 4년간 일하면서 많은 걸 배우고 익혔지만, 요리는 별개였다.

칼질 한 번 제대로 안 해보고 시집가는 딸이 걱정돼 시작한 엄마의 새댁 요리강습 때에도 나는  

"칼질 좀 못하면 어때, 요즘 도구가 얼마나 좋은데. 나 곰돌이 채칼 사고 가면 돼"라며 우스개 소리를 했었으니까.


신혼초에는 입덧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아이를 낳은 후에는 양가 부모님 댁을 차로 5분이면 갈  수 있는 동네로 이사해 엄마나 어머님이 요리를 해주시거나, 호박 다듬기 힘들다며 껍질까지 다 다듬어 먹기 좋게 잘라주시면 그걸 가져다가 국도 볶음도 해 먹으며 지냈으니.

나의 요리 자립도는 하수 중 하수.

내가 할 줄 아는 건 겨우 유아식이었다.


그런 내가 늙은 호박을 1:1로 마주해 다듬는다 생각하니 요리 자립도가 3쯤 업그레이드된 것 같아 신이 났다.


그. 런. 데.


와, 늙은 호박. 너 뭐니?


늙은 호박 다듬기가 이렇게 힘든 거였나?

반으로 나누어 씨를 파내고 껍질을 조금씩 칼로 다듬는데 너무 딱딱해서 반으로 나뉘는 것부터 막혀서 잘 다듬어지지도 않고 사이즈는 왜 이리도 큰지 다듬고 다듬어도 끝이 없었다.


다듬기 시작해서 몇 분 지나지도 않았는데 나는 후회했다.

아, 그냥 시작을 말걸. 그냥 썩든가 말든가 내버려둘걸.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이걸 시작했나부터 전자레인지에 살짝 돌릴까?

근데 그럼 이 큰 호박을 다 먹지 못할 텐데 어떡하지?

이대로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보내버리고 싶다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5분이면 되겠지 생각했다가 한 시간 가까이. 해도 해도 끝이 안 보이는 늙은 호박 다듬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호기를 넘어 오기로 꿋꿋하게 늙은 호박을 다듬었다.


와 진짜 이렇게 어렵고 힘든걸 이제껏 아무렇지 않게 너무 쉽게 당연하게 누리며 살았구나.

그동안 맛있게만 먹어왔던 호박을 떠올리며 엄마, 어머니, 식당 아주머니들께 절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앞으로 늙은 호박 반찬이 나오면 절대 하나도 남기지 말고 먹어야겠다는 다짐을 할 만큼 너무 고됐다.


그동안 내가 당연하게 누렸던 것들이 그 어느 것 하나 당연하고 쉬운 게 없었겠구나.

내 딸이, 내 며느리가 고생할까 봐 부모님이 베풀어주신 음덕으로 그동안 편히 살았구나.


받기만 하고 늘 되갚지 못하는 부모님의 은혜를 다시 한번 되새기며.

이 글을 빌어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늘 고맙고. 미안하고.  사랑합니다. 오래오래 건강하게 함께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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