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 세제가 똑 떨어졌다.
마지막 세탁세제를 탈탈 털어 넣으며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코로나 마스크 대란을 시작으로 ‘혹시몰라병’이 도져서 가구부터 생활용품까지 풀로 채워, 늘 여유 있게 쟁여놓는 버릇이 생겼다.
한때 신혼 초 미니멀라이프 신봉자로 잠시 살던 시절에는 세탁세제도 필요할 때 한두 개씩만 떨어지기 전에 채워놓던 걸 이젠 박스째 사놓고 쓰던 터라 떨어질 걸 생각지도 못했다.
잘 체크한다고 했는데 바빴던 4월의 여파가 이렇게 다가왔다.
‘아무것도 없는 집에 살고 싶어’를 외치며 모든 짐을 줄였던 신혼 초의 나는 어디로 갔나.
코로나가 겨우 잠재웠던 ‘불안’을 앞세워 다시 나의 맥시멀라이프를 부추겼다.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기는 어렵지만, 원래상태로 돌아가는 일은 너무도 쉬운 일이다.
옷을 사도, 필기구를 사도 마음에 들면 깔별로 크기별로 한 묶음씩 쟁이던 버릇을 겨우 버렸다 생각했는데 역시 사람 참 안 변한다.
친정집에 갈 때마다 아니 무슨 짐이 이렇게도 많냐고 엄마에게 잔소리하며 미니멀라이프를 전도했던 나였는데 이젠 우리 집 짐이 더 많아진 느낌이다.
때가 지난 것 같지만 아직도 버리지 못한 유아장난감부터 이젠 거의 벽지가 되어버린 (벽한 켠에 쌓여있지만 읽지 않아 화석처럼 박혀 버린) 아이들 책, 때 되면 다시 찾을까 봐 버리지 못한 계절용품들을 비롯해 사용하지 않을 물건들이지만 버리지도 못한 물건이 켜켜이 쌓여 나를 옥죄어 왔다.
수납공간이 없다는 핑계로 너무도 자연스럽게 어딘가 올려지는 짐들의 형상은 결국 친정집 어느 한편과 똑같았다.
이것도 유전인가… 아니 살아오며 쌓인 습관의 무덤일지도…
매계절 아니 매일 아무리 크고 작은 비움으로 짐을 줄여봐도 세월이 쌓는 짐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이사 온 지 10년쯤 된 집은 아무리 짐이 없다고 해도 이삿짐센터에서 믿지 않는다더니 그 말이 딱 맞다.
얼마 전 아이들에게 방을 하나씩 내어주며 갈 곳 잃은 짐들이 베란다와 거실 한편에 쌓여있지만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아 못 본 척 애써 무시하며 살고 있는데,
나 정말 이대로 괜찮을까?
똑떨어진 세제를 소량 구매하며 다짐했다.
나 이제 맥시멀라이프를 끝내고 다시 미니멀라이프로 돌아갈 거다.
마지막이었다. 세탁세제에게 나의 값비싼 부동산 한 평을 내어주는 것은.
이젠 더 이상 필요 없는 물건들에게 나의 공간을 내어주지 않을 테다.
내일부터 조금씩 정리해 다시 심플라이프를 즐길 것이다.
라는 다짐은 코로나 시국에도 했던 것 같은데…?라는 의심 따위 잊어버리자.
시작이 반이다.
내일은 우선 버리려고 모아둔 폐지와 작아진 아이들 신발을 버리고 나의 현관 1평을 사수해야지.
그리고 또 조금씩 나의 공간을 우리의 공간을 넓혀가야겠다.
안녕, 나의 맥시멀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