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를시작하면서 미루어 왔던 여러 가지 일들을 시작할 수 있었다. ‘시작했다’가 아니라 ‘시작할 수 있었다’라고 한 건 내 글이 그렇게 하도록 나를 견인해주었기 때문이다. 글의 힘은 참으로 놀랍다. 사람을 치유하는 힘이 있는 것은 물론이요(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모두에게), 글로써 다짐한 것들을 실천하도록 해준다.
내가 쓴 글들은 나의 손을 떠났고 증발되어 독자에게로 날아간다. 어떤 글이든 그것은 그 글을 읽는 사람에게 하는 선전포고와 같다. 그들을 기만하면 안 되니까, 뱉은 말은 책임져야 하니까, 필경 글은 말보다 더 오래, 지독하게 남을 테니까, 연필로 꾹꾹 눌러쓴 다짐들은 지켜져야만 한다. 글의 무게가 무겁다는 것이 실감 날 때마다 ‘앞으로는 아예 쓰지 않는 게 낫겠다’, 그런 생각도 한다.
문제는 ‘명현현상’이다. 한의학에서 유래된 ‘명현현상’이라는 말은 내 식대로 해석해 ‘안 하던 짓을 하면 병이 난다’이다. 실은 병이 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결국은 치유를 가져다준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치유되는 과정에서 잠시 이상 증상이 나타날 뿐이지 잘 참고 견디면 언젠가 치료된다는, 알쏭달쏭하지만 소망적이고 기이한 현상이다.
그렇다. 나는 내가 쓴 글대로 살려다 자꾸만 발생하는 ‘명현현상’들을 체험할 수밖에 없었다.
<운동하고 살겠습니다>라고 글을 썼기 때문에 이를 실천하기 위해 10분짜리 아침 요가를 시작했다. 요즘은 ‘홈트(Home Training)’가 대유행이라 유튜브에만 해도 어마어마한 운동 영상들이 있다. 내가 시작한 건 전통 요가가 아니라 스트레칭과 요가 동작이 합쳐진 간단하고도 따라하기 쉬운 운동이다. 그렇긴 해도 안 하던 걸 하려니까 허벅지에는 ‘악!’ 소리 나게 쥐가 나고, 며칠 몸이 안 아픈 데가 없이 아팠다. 슬그머니 요가매트를 말아 넣고 전기매트 위에 드러눕기를 여러 번이었다. 그러다 <와식생활을 끊겠다> 다짐한 글이 글이 떠올라 용수철 같이 벌떡 일어나기도 했다.
<좋은 음식을 먹겠습니다>라고 글을 썼으니까 라면을 끊으려 노력했다. 대신 아보카도와 생 야채를 노no 드레싱으로 먹곤 했다. 며칠씩 고기도 없이 부실하게(?) 먹다 보니 어지러워져서 또 전기 매트 위에 드러누웠다. 그런 날엔 삼겹살을 구워 와구와구, 쳐묵쳐묵 하기도 했는데, 이런 부작용이 나타나는 건 정말, 진심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괜히 <어떤 상황에도 남편을 사랑하겠다>고 글을 썼나. 잔소리 대신 들어주고, 돌봐주고, 사랑해줘야지 다짐하긴 했는데 역시나 쉽지 않았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은 즉시즉시 내뱉어야 하는 사람이다. 흔히 “나는 할 말은 다 하는데, 대신 뒤끝은 없어.”라고 말하는 류의 사람. 이런 사람은, 이미 할 말을 다 한 것만으로도 상대에게 큰 상처를 준다는 걸 모른다. 할 말을 다 안 하려니 병이 날 것 같았다. 잔소리를 안 하려니 그게 마음속에 눈덩이처럼 쌓였다. 그러다 한 번에 터지면 폭탄도 그런 지랄 폭탄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체로 명현현상을 극복하고 치유의 상태로 접어든 것 같다. 물론 아직 이상 증상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것들도 몇몇 있지만 말이다. 작심한 것도 삼일 이상 실천하면 성공이라고 본다. 나는 글로 다짐한 것들을 삼일 넘게 실천하고 있으니 빛이 보이지 않는가. 꾸준히 가계부를 쓰고, 식단을 조절하고, 운동은 아침 운동에서 시작해 저녁 운동으로 까지 늘리고 있다. 글을 쓸 때는 무리하게 쥐어짜지 않으려 노력하고 오늘은 오늘의 분량만큼만 용감하게 살려고 한다.
안 하던 짓을 하면 여지없이 병이 나고 만다. 그러나 그걸 극복 못하면 영영 치유는 없다. 그러니까 살짝 병이 나더라도 쫄지말고 극복해야만 한다.
글은 분명 꼼짝 않고 앉아서 쓰는데 어쩜 그게 나를 움직이고 행동하게 만드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글에서 시작하여 행동으로 실천하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보람을 느낀다. 행동에 따르는 어려움들을 하루 이틀 극복해 나가는 내가 자랑스럽다. 그러니 앞으로는 내가 작심하는 것들을 글로 써야겠다.
이렇게 좋은 ‘글쓰기'를 안 할 이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