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가 끝나간다. 어제는 10년 만에(아마 더 됐을 거다) 등산도 했다. 안 하던 짓을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인왕산의 야경은 숨 막히게 아름다웠다. 난이도 상중하 중 '하'라고 하는데 나에게는 '상'이었다. 미니미니 한 사이즈의 암벽. 그것도 암벽이라고 나름 끙끙 거리며 올랐다.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고 싶어 할 때는 둘 중 하나 거나, 그 둘 다다. 무료하던가. 신경을 다른 데로 돌리고 싶던가. 나의 경우는 둘 다였다. 머릿속에 꼬리처럼 이어지는 회사 생각을 지우고 싶었다. 오래간만에 토할 것 같았다. 스위치를 꺼버리고 싶은데 잘 안된다.
오늘은 한 시간을 걸었다. 부모님을 등지고 당연천 길을 빠른 속도로 걸었다. 오리가, 까치가 가진 깃털 빛깔이 너무 예뻤다. 집에 와서는 한동안 뻗어 잠이 들었다. 내가 가장 힘들 때는 그 좋아하는 책 조차 손에 잡히지 않을 때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다. 기쁨에 차오른 감정일 때가 아닌 내 마음이 내 맘 같지 않을 때, 속상할 때가 되어서야 글을 끄적일 생각이 겨우 든다.
거실에 있는 커다란 TV로 무료 영화를 찾아 뒤적거린다. 유튜브 토막 영상을 질릴 때까지 봤더니 명절 내내 먹던 기름진 음식처럼 조금 물린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라는 일본 영화가 있다. 책으로 알게 됐을 때부터 읽어봐야지 했던 건데 잘됐다 싶어 버튼을 꾹 누른다.
원작 소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자의가 한 80%로 보이는 외톨이 고교생 남주 하루키는 어느 날 맹장 수술을 하고 병원에서 나오는 길 '공병 문고'라는 한 여자 아이의 일기를 발견하게 되고, 별생각 없이 펼쳐 읽은 페이지에는 자신이 얼마 뒤 죽는다는 내용의 글이 적혀있다. 그렇다. 그 일기의 주인공은 같은 반 학우이자 핵인싸 러블리 인기녀 사쿠라. 도대체 왜... 일본 미소녀들은 다 죽을병인가.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다만 널 사랑하고 있어'가 단박에 떠오른다. 둘 다 이러니 저러니 하면서도 눈물 질질 훔치면서 재밌게 봤다. 예나 지금이나 내 기억 속의 일본의 주인공 소녀들은 웃는 얼굴이 쏟아지는 햇살처럼 예쁘고, 곧 부러질 것처럼 말랐으며, 곧 죽는단다. 아무래도 먹히니까 계속 나오는 소재겠지. 하긴. 나에게 있어 죽음을 앞둔 미소녀와 순박한 소년 스토리의 원조는 황순원의 '소나기'다. 내 인생 소설과도 같다. 소녀가 소년과의 추억이 담긴 분홍 스웨터를 자신과 함께 묻어달라는 유언에 열두 살의 나는 청승맞게 울었다.
그런데... 이젠 좀 많이 식상하다. 그렇게 나는 비뚤어진 사춘기 여자애처럼 아무도 보라고 시키지 않은 영화를 계속 봤다. 핵인싸 사쿠라의 비밀을 알게 된 죄 아닌 죄로 하루키는 지독하게 그녀와 얽히게 된다. '너췌장' 속 여주는 그 어여쁨만큼이나 아주 많이 당돌했다. 아 그냥 꺼버릴까? 처음엔 뭔가 싶어 끌까 말까 고민되던 찰나 아래와 같은 사쿠라의 대사가 나와 움찔,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우연이 아냐. 흘러온 것도 아냐.
우린 모든 걸 스스로 선택해서 여기 온 거야
...
네가 해 온 선택과 내가 해 온 선택이 우리를 만나게 한 거야
우리는 스스로의 의지로 만난 거야
모든 건 우연도 아니고 운명도 아니라는. 누군가 억지로 끌고 온 것이 아니라 내가 해온 선택이 지금의 나를 여기로 이끌었다는 말. 내 선택에 책임지기 싫은 어린애처럼 이상하게도 그 말이 싫고 슬펐다.
관계를 배우다
싫고 슬펐던 말을 시작으로 희한하게 많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누군가 내게 의지한다 는 것. 너무 소중해서 오히려 잃을까 두려워 말 못 하는 진실들. 외로우면서도 혼자 있고 싶고, 혼자이고 싶으면서도 너무 외로워서 어딘가에라도 손을 뻗고 싶어 지는 순간. 소년은 지독하게 얽혀가는 소녀에게 관계에 대해 배우기 시작한다.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법. 누군가와 친구가 되는 법.
'사람 사이'
영화 속에서 그들이 자주 하는 게임이 있다. 두 명이나 각각 동일한 양의 카드를 나눠 가진 다음 한 장의 카드를 동시에 뒤집는다. 카드의 숫자가 더 높은 사람이 숫자가 낮은 사람에게 외친다.
" 진실이냐, 도전이냐 "
진실을 선택하면 숫자가 높은 사람이 하는 질문에 진실을 대답하면 되고, 도전을 선택하면 숫자가 높은 사람이 시키는 걸 뭐든 해야 하는 게임이다.
" 너에게 산다는 건 뭐야? "
라는 다소 철학적이고 재미없는 질문에... 소녀는 답한다.
산다는 건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는 일.
누군가를 인정하고 좋아하게 되고 싫어하게 되고,
누군가와 함께 있고 손을 잡고 서로 껴안고 스쳐 엇갈리고
그게 산다는 거야.
혼자 있으면 살아 있다는 걸 알 수 없어.
그런 거야.
좋아하면서도 밉고 즐거우면서도 우울하고
그런 혼란스러운 감정과 남과의 관계들이
내가 살아있단 걸 증명해 주는 것 같아.
누군가를 인정하고 좋아하게 되고, 싫어하게 되고, 욕도 하고, 손을 잡고, 스쳐 엇갈리는 것. 내가, 그리고 우리가 늘 숨 쉴 듯하고 있는 일이다. 좋아하면서도 밉고 즐거우면서도 우울한 그런 혼란스러운 감정들과 남과의 관계들을 증오하면서 말이다. 사쿠라가 하루라도 더 살고 싶다고 말하며 그토록 바라던 것들. 그래 감사하며 살아야지,라고 마무리지으면 아름다울 텐데. 지금의 나는 왜 그런 것들이 그토록 신물 날까. 어쩌면 나는 아직 눈물 나게 삶의 절정 속에 살고 있나 보다.
**을 먹어주는 인형이 있었으면 좋겠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너무나도 소중한 사람의 일부를 먹으면 그 사람이 내 안에 영혼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는, 다소 섬찟하지만 애절한 어느 나라 미신. 너무나도 당연히 사랑해 마지않는 부모를 제외하고, 그 정도로 소중히 남길 수 있는 사람이 인생에 단 하나라도 존재할 수 있다면. 막연히 그런 생각들을 흘려보내다가 작은 한 숨이 나온다. 지금의 나는, 당장 이 순간의 내 걱정과 슬픔, 외로움을 먹어 치워 줄 걱정 인형이 필요한 사람이구나 싶어서. 어쩌면 그런 현실을 그냥저냥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안도하며.
#너의췌장을먹고싶어 #걱정인형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