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라쇼 Oct 08. 2015

구텐베르크가 만든 혁명

돈벌이가 낳은 각성과 지식·문화 보급

일기: 2015년 10월 7일과 8일


비행기를 타기 직전까지 작업하던 게 있어서 점검을 못했다. 챙겨 놓은 전자책 단말기에 책을 다운받는 걸 깜빡했다. 읽을 책을 한 권씩 내려받았더니, 인터넷이 안 될 때엔 읽을 게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럴 줄 알고 종이책도 챙겼다.


나는 이런 일로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왔다.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취재할래요?”

크라우드 펀딩에 도오전

일정 점검과 콘텐츠 콘셉트 재확인



읽은 책은 영국 역사학자 존 맨이 쓰고 역사서와 철학서를 쓴 남경태가 옮기고 예지가 펴낸 <구텐베르크 혁명>이다. 독일에 가는 목적이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인 만큼 제목에 구텐베르크가 들어간 책 3권을 샀는데 그중 하나이다. (구텐베르크의 고향은 프랑크푸르트 근처 마인츠란 도시. 마인츠에서 인쇄 사업을 하였고 그의 동업자는 인쇄한 책을 프랑크푸르트에서 팔았다)

책은 어렵지 않았다. 세계사 책을 읽는 느낌이다. (구교 안의 갈등과 신교와 구교의 싸움 부분이 지루하면 건너뛰면 된다) 구텐베르크가 금속 활자로 인쇄하는 일을 벌리기 전후 상황과 이 일이 유럽에 끼친 영향을 설명한다.
 


구텐베르크와 프랑크푸르트의 연결고리

구텐베르크는 비밀리에 스트라스부르에서 인쇄기술을 시험했다. 고향 마인츠로 돌아와 인쇄사업을 시작했고,  그의 동업자는 프랑크푸르트에서 판매처를 물색했다.

프랑크푸르트는 마인강을 끼고 선 도시다. 독일 전역의 상인이 모이는 길목이었고 일년에 두 차례, 봄과 가을에 큰 시장이 열렸다. 이 시장은 지금의 프랑크푸르트가 각종 박람회를 여는 도시가 되는 토대를 만들었다. 서적은 1480년 이 시장의 정식 상품이 되었으며, 이 역사적 사실은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의 권위를 만든다.


구텐베르크는 인쇄로 돈을 벌려고 한 사업가


구텐베르크보다 200년 앞서 금속활자로 상정고금예문(1230-1240년대 사이에 인쇄한 걸로 추정)과 직지심체요절(1377년)을 편찬한 고려.


고려의 이 두 책은 개인이 돈을 벌려고 만든 게 아니었다. 반면 구텐베르크는 사업가였다. 구텐베르크가 찍은 인쇄물은 상정고금예문, 직지심체요절과 달랐다. 구텐베르크는 얼마의 돈을 내면 죄를 없앤다는 면죄부와 라틴어 문법 책, 미사집을 찍었다. 모두 당시의 베스트셀러가 될 만한, 그야말로 팔릴 만한 것들이다. 요즘으로 따지면 핫한 산업을 개척했다. 그의 동업자와 조수는 그 밑에서 또는 그와 함께 일하며 얻은 인쇄 비결을 독일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으로 퍼뜨렸다. 실리콘밸리에 대입해 말하면 페이팔 마피아가 되려나.(회사 팔고서 나온 자금으로 활동을 한 건 아니지만)

구텐베르크는 필경사가 쓴 책에 못지 않는 아름다움을 인쇄물에도 표현하였고, 그러면서도 대량으로(필경본과 비교하면) 찍었으며, 그가 개발한 기술을 유럽에 퍼뜨렸고(독점하려 했으나 이렇게 되고 말았음), 자기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려는 욕구를 자극했다. 그래서 프랑스의 혁명군은 마인츠를 점령했을 때 구텐베르크의 업적을 칭송하고 마인츠에 구텐베르크 광장을 만들고 그의 동상을 세웠다.

글자를 금속에 새기는 주물과 주조, 글꼴을 통일하기, 글자 크기와 간격, 한줄에 담을 단어 또는 글자 수 정하기, 알맞은 여백, 인쇄할 종이 찾기, 여러 번 인쇄할 수 있는 기기를 만들기... 구텐베르크가 닦은 노하우와 기계는 동업자가 뺏어갔으며, 그 동업자와 그의 아들이 이어갔다.


구텐베르크는 신교가 등장하기 전 종교 싸움에 휘말려 마인츠에서 쫓겨났으나 새 정착지에서 인쇄 사업을 이어갔다. 이곳에서 그는 또 인쇄 기술을 퍼뜨렸으며 (인쇄하는 데에 주조공과 인쇄공 등이 필요하므로 아무리 보안을 철저히 해도 기술은 퍼질 수밖에 없었다) 1500년까지(1500년대가 아니다) 독일 60개 도시, 인쇄소 300곳에 퍼졌다. 독일의 인쇄공은 프랑스와 이탈리아, 영국, 에스파냐, 포르투갈,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 헝가리, 폴란드, 보헤미아, 아프리카로 흩어졌다.


구교의 활동 자금을 만든 면죄부 찍던 구텐베르크, 신교가 등장할 실마리를 제공


구텐베르크는 장사아치였다. 그가 인쇄한 면죄부는 기존 세력, 보수 세력의 활동자금이 되었다. 면죄부를 인쇄할 권리를 얻은 권력자는 돈을 얻을 수 있었다. 자금을 얻으려고 면죄부 찍기에 혈안인 권력자는, 면죄부를 많이 찍기를 원했고 구텐베르크는 안정적인 구매자를 원했다. 그러니까 구텐베르크는 그의 사후 등장한 마르틴 루터가 그렇게도 비판한 구교를 위한 일을 한 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마르틴 루터는 구테베르크가 독일과 유럽에 퍼뜨린 인쇄기술 덕분에 자기의 주장을 과거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빨리, 멀리 전파했다.



1400년대 초반, 구텐베르크가 인쇄 기술을 개발하기 전 유럽과 독일의 상황


독일엔 금속활자를 주조할 환경이 조성되었다. 광산과 금속 가공인이 있었고, 여기에 투자할 부자들이 있었다. 또,  유럽에 종이가 들어왔다. 아시아가 먹을 흡수하도록 얇은 종이를 제작하였다면, 유럽은 이 방식에다 짐승의 기름을 더하여 날카롭고 딱딱한 깃펜으로 쓸 수 있는 종이를 만들었다.


구매 환경 또한 조성되었다. (구텐베르크가 활동하던 시기 길드가 조성) 도시가 발전하면서 수도원이 아닌 학교에서 학문을 연구하게 되었고, 1350년경 대학이 설립되면서 책에 대한 수요가 늘었다. 양피지에서 천으로 만든 책이 등장하면서 책은 이전보다 싸졌다. 구텐베르크가 성년이 되었을 무렵으로 추정하는 15세기 초반 독일에서 필경사와 채식사, 장식사, 제본사를 고용하여 책을 만드는 필사실은 수지맞는 장사를 했다. (책 팔아 돈 버는 환경이 형성되었단 말씀)


부자는 더 부자가 되면서 예배를 집에서 드리고 싶어하여 사제들은 가방에 넣고 다닐 미사전서가 필요했다. (4절 크기) 또, 교회는 모두가 어디에서든 같은 방법, 같은 순서로 예배를 드리기를 원하여 미사전서를 통일하려고 했다. 즉, 미사전서를 통일하면 이를 출판하여 보급하여야 했으므로 출판물에 대한 수요가 자라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며 알게 된 것들


구텐베르크의 탄생 기념일이 있으나 그의 생년월일은 미상이다. 마인츠 시는 1890년대 구텐베르크 기념일을 지정하기로 하면서 1900년을 탄생 500년으로 하고(그냥!) 구텐베르크의 이름이 요하네스란 점에 착안, 세례자 요한의 축일인 6월 24일을 구텐베르크의 생일로 정했다. 학자들은 그가 1394년에서 1404년 사이에 태어났을 걸로 추정한다. (그의 아버지 유언에 따르면 부친이 사망했을 때에 구텐베르크는 성인이었을 거란 셈법)

구텐베르크라는 성은 그의 선조가 살던 집 이름이다. 구텐베르크란 이름을 가진 집에 살면서 생겼다. 원래 이런 식이었을 거다. 구텐베르크에 사는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인쇄물을 찍은 시점에서 1500년까지를 요람기라 부른다. 이 시기 유럽에서 초판은 500부를 찍었다. (2015년 이와 비슷한 수준으로 찍는 출판사, 찍히는 책은 600년 전과 비슷하여이다? 이를 피할 출판사는 많지 않으리라고 추정해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일정 점검과 콘텐츠 콘셉트 재확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