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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기 Jul 27. 2020

맑은 날과 궂은날

개와 고양이 이야기


한참 글을 못 써서 글 쓰려던 순서를 다 잊었으니 어제, 오늘 일부터 적어야겠다. 서울 다녀오기 전에도 그랬고, 다녀와서도 일상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라고 할 만한 것들이 거의 개들과 고양이와 관련된 것이니, 어느 날의 일기를 써도 개와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어쩌면 아빠 말 대로 제주도에 있으면서 시간낭비를 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이미 만난 인연이고, 그래도 세 마리 개와 한 마리 고양이의 생이 걸린 일이 시간 낭비일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이렇게 시간과 애를 쓰고도 뾰족한 수가 없이 개들이 새로운 삶을 찾지 못하게 된다거나, 고양이에게 밥을 준 일이 후회만 남기는 일이 된다면 시간 낭비를 한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 그러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쉬운 길을 찾으려고 하지 말고, 시간을 들이는 것을 무서워하지 말고, 차분하게 기록하고, 사람들과 공유하는 길을 하나씩 찾으려고 한다. 원래 나는 뭐든 지름길을 찾으려고 하다가 지치는 일이 많지 않았던가.      

글도 잘 쓰려고 애쓰지 말고, 하나하나 써 나가자. 새로운 이야기가 생기면 또 부지런히 쓰고.

밖에 비가 많이 오고, 아침에 아이비가 안쓰러워서 짧은 산책을 했다가 집에 안 들어가려고 하는 아이를 어쩌지 못해 집 앞 처마 밑에 묶어 뒀었다. 그런데 갑자기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서 얘랑 같이 우산을 썼다가, 창고에 들어갔다가, 지금은 같이 사는 동생 집 부엌에 같이 들어와 있다. 이 비를 뚫고 다시 집에 데려다 놓을 수도 없었고, 우산도 무서워하는 녀석이 창고에 두면 더 불안해할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방법이다. 동생한테 말도 안 했으니, 미안하고 실례가 되는 일이다. 동생이 돌아오기 전에 깨끗하게 청소를 해 놓아야겠다. 나와 아이비만의 비밀인데, 이렇게 글로 써 놓아도 되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참 불안해하다가 내가 앉아 있는 테이블 밑에 얌전히 앉아 있는 걸 보니 그렇게 나쁜 선택도 아니었다 싶다. 어제는 날씨가 그렇게나 좋더니 오늘 이렇게 또 억수같이 비가 오다니 제주도 날씨는 정말 모를 일이다. 한여름이 되기 전까지는 제주도에 더 살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고, 겨울에 바람이 많이 불거나, 봄이 되어도 바람이 쉽게 따뜻해지지 않는 것도 다 좋았다. 그런데 여름 바다는 정말 예쁘지만 이렇게 긴 장마가 오니 습기는 견디기가 힘들다. 비가 오지 않아도 높은 습도는 사람을 내리눌러서 기운을 내기 힘들게 한다.

 

그래서 어제와 그제 햇살이 너무 반가웠다. 쨍하고 모든 것을 말려줄 것 같은 햇빛. 그저께는 더위를 피해 집에 앉아서 한동안 책을 읽었고, 뭔가 집중해서 할 수만 있다면 우울에 빠지지 않고 뭐든 할 수 있을 거라는 밝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어제는 날이 더 맑고 좋아서, 당장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어마어마한 습도를 견디며 우울했을 개들을 데리고. 지금 당장 개들이 사는 환경을 바꿔 줄 수는 없지만, 이렇게 맑은 날 같이 나가서 놀 수 있으면 개들도 좋아할 것 같았다. 짝꿍을 재촉해 물놀이 갈 채비를 하고, 햇살이 더 강해지기 전에 서둘러 나섰다.

해안선을 따라 적당한 장소를 찾아 걷다가 사람들이 없고 물놀이하기에 적당한 곳을 찾아 내려갔다. 나는 대자연의 시기가 덜 끝나서 물에 들어가지는 않고, 지난번 산책할 때 찾은 용천수에 발만 담갔다. 바닷물보다 시원해서 기분이 좋다. 짝꿍은 작년에 사 둔 스노클링 마스크를 쓰고 바다에 둥둥 떠다녔다. 개들은 파도가 무서웠는지 바닷물 앞에서 뒷걸음질 치기를 몇 번 하더니, 내 귀 옆에서 시끄럽게 헥헥거리며 구경을 하다가 옆에서 자기들끼리 바위를 오가며 놀았다. 너무나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너무’는 부정적일 때 쓰는 말이라고 해서 되도록 쓰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 모습은 우리의 현실과 동떨어져 평화롭고 아름다운 모습 같아서 ‘너무’를 쓴다.

물론 순간순간이 모여 삶을 만드는 것을 생각하면, 현실과 동떨어진 순간이 있을 수 없겠지만, 그 순간의 행복이 정말 ‘순간’ 일뿐 연속되는 삶의 조각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개들은 사람처럼 과거나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순간을 산다고 하는데, 그래서 즐거운 '이 순간’이 위로가 된다기에는, 더러운 집에 묶여 굶고, 벌레에 시달리는 시간이 훨씬 길다. 강아지들이 모두 좋은 사람을 만나 앞으로 건강하게 지낼 수 있다면, 더울 땐 물놀이하고, 추울 땐 따뜻한 곳에서 잘 수 있다면 ‘순간’을 사는 강아지들의 시간이 행복으로 가득 찰 수 있겠지.      


집에 와서는 목욕을 시켜줬다. 따뜻한 물로 씻겨주기가 어려워서 아주 더운 날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는데, 마침 어제가 아주 더운 날이었고, 물놀이도 하고 왔으니 괜찮을 것 같았다. 보리는 지난번에 무무 씻길 때 간단히 씻겨 주었는데, 이번에도 그때처럼 샴푸를 간략하게 하고 잘 문질러 씻어주었다. 물 호스가 길어서 처음엔 아주 뜨거운 물이 나왔는데, 금세 차가운 물로 바뀌어서 오래 씻어줄 수는 없었다.

아이비는 너무 순해서 매번 우리를 놀라게 하는 아이인데, 목욕도 정말 얌전하게 잘했다. 아무리 래브라도 레트리버(이거나 믹스)라고 해도, 이 정도면 어릴 때 집에서 가족들과 산 적이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점점 합리적인 추정으로 느껴진다. 보리도 그랬지만, 아이비는 못 씻은 세월이 좀 더 길어서 그런지, 씻겨 놓고 나니 원래도 예쁜 얼굴이 뽀얗게 빛나고, 털도 반짝거리고, 만지면 뻣뻣했던 털이 부드럽고 뽀송뽀송했다. 어디 내놓아도 부럽지 않을 모습이었다. 한참을 씻기고, 말리고, 고양이 냄새도 맡고, 마당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는데, 마당 뒤꼍으로 가더니 어어 하는 사이 담을 넘어 뒷집으로 가버렸다. 예전에 보리랑 아이비가 우리 마당에 왔다가, 그 담을 넘어 직행해 뒷집 진돗개랑 말라뮤트랑 인사를 하고 있었는데, 이번엔 그 집에 담이 생겨서 못 넘어가려나 했는데도 훌쩍 넘어 또 진돗개 냄새를 맡고 있었다. 아이비는 중성화도 안 했으니 불안해서 불렀더니 오긴 했는데, 자기가 넘어갔던 담을 다시 못 넘어온다. 결국 내가 넘어가서 아이비랑 같이 동네 한 바퀴를 하고 돌아왔다. 신기한 건 아이비가 줄을 안 했는데도 나랑 같이 집으로 바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긴 산책과 물놀이가 산책 욕구를 충분히 채워주긴 한 모양이다. 해가 쨍쨍한데 마실까지 다녀왔으니 털도 다 마르고 해서 아이비는 집에 데려다주었다. 깨끗하게 씻긴 아이를 또 흙바닥에 두고 오려니 마음이 쓰렸다. 그래도 아이비에겐 일단 그곳이 집이니 안전하게 쉬길 바라는 수밖에. 지금 아이비 집은 원래 보리가 있던 곳인데, 아이비를 원래 있던 곳에 두면 길에 사는 수컷이 또 임신을 시킬지도 모르니 다른 곳에 두자고 아저씨를 설득해서 그곳에 옮겨 준 것이다. 험하긴 마찬가지이지만 그래도 임신의 위험이 거의 없고, 비가 오면 피할 곳도 있고, 진드기도 덜하니 아이비에겐 더 나을 것 같았다.

아이비를 집에 데려다주고, 무무 중성화 수술한 자리를 소독해 주고 싶었지만 저녁에 짧게라도 산책을 시킨 후에 해 주기로 하고, 보리는 마당 그늘에 두고, 고양이는 두 마리 강아지에게 번갈아가며 털을 세우고 하악질을 하느라 바쁘더니 익숙해졌는지, 안정이 되었는지 자리를 잡아 쉬고 있었다. 이렇게 개들이랑 실랑이를 하고, 고양이까지 마당을 돌아다니고 있으면 정말 동물농장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비의 집

고양이와 강아지들은 정말 좋지만, 조금 버겁고 힘들게 느껴지는 건, '이 아이들을 내가 어떻게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까, 내 존재 하나만으로도 벅찬데'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좀 더 실질적으로 생각해 보면 ‘루틴’을 만들 수가 없다는 점인 것 같다. 머릿속으로 오늘은 강아지들과 고양이를 어떤 순서로 어떻게 해 줘야지라는 계획을 갖지만 막상 그 계획대로 되는 일은 거의 없다. 산책을 길게 다녀오는 건 계획 변경 축에도 들지 못한다. 밥을 주려고 갔는데 주변에 똥은 물론 음식쓰레기가 널려져 있거나 갖가지 쓰레기가 버려져 있을 때면 신경이 툭 끊어지는 기분이 든다. 한 번은 보리 집에 쥐가 붙어 있는 쥐덫이 버려져 있기도 했다. 글로도 그 기억을 남기고 싶지 않아 적기를 망설였다.

줄이 꼬여서 옴 작달 싹을 못 하고 있거나, 너무 배가 고파 막 달려든다거나 하는 건 일상이라 해도, 짠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작게 낑낑거리는 소리를 내면 차마 밥만 주고 돌아올 수가 없다. 짧게라도 산책을 해 주고 싶고, 준비 없이 산책을 나가면 또 변수가 생기고, 몸도 힘들고. 그러다 보니 일정한 루틴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서 에너지 소모가 더 많이 되는 것 같다. 에너지 소모를 많이 하다 보니 기분도 더 다운되고.


오늘 갑자기 비가 많이 쏟아져서 허둥지둥 한 일도 그렇다. 나중에 보니 제주지역 호우 경보 문자가 왔다. 아이비랑 산책을 하고 오니, 아이비랑 더 놀아주지 못한 것도 그렇지만, 보리도, 무무도 눈에 밟히는데, 산책을 하는 대신 들어와 이 글을 쓰고 있다. 지금 내가 아이들이랑 산책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좋은 입양처를 찾아주는 것이 더 근본적인 문제 해결 방법일 것이다. 이렇게 긴 글이라 무슨 도움이 될까 싶기도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나하나 최대한 집중해서 해 보는 수 밖에는 없다.      


이 글을 쓰는 중간에 아이비를 제자리에 데려다주고 왔다. 비가 조금 잦아든 사이에. 골목 앞까지 나가자 더 나가자고 해도 될지 눈치를 보는 것 같은 모습에 동네 어귀 꽃밭까지 나가 똥도 누고 왔다. 그 똥은 내가 다시 호미 들고나가서 치웠고, 아이비는 당연히 집에 다시 묶이기를 싫어해서 조금 버텼지만 어쩔 수 없이 다시 묶어 두었다. 동생 집에 계속 있을 수도 없고, 비가 올 때마다 데리고 올 수도 없으니까. 마음이 아프지만 냉정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셋 중 둘 만 이라도 입양이 되어서 한 마리만 남게 된다면 우리가 데리고 살면 좋겠다. 한 마리만 이라면 원하는 대로 뭐든 해 줄 수 있을 것만 같다. 아이비여도, 무무여도, 보리여도 좋다. 하나하나 예쁘지 않은 아이가 없다. 깨끗한 것 먹이고, 깨끗한 곳에서 잘 수 있었으면 좋겠다. 모든 생명들이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바퀴벌레도 깨끗한 음식을 좋아한다더라. 아무래도 사람이 너무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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