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이 있는 집

초가을 아침 산책

by 서기


앉아서 뭐라도 쓰기 시작한다는 게 중요한 것 같다. 그러지 않으면 쓰려고 생각했던 것도 금세 날아가 버리고 혹여 나중에 다시 쓰려고 하면 괴롭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

아침에 보리랑 하모 해변 산책을 했다. 새벽에 일어나려는 계획이었는데, 오히려 수면에 도움이 된다는 유튜브 영상을 켜 놓고 잤다가 핸드폰이 꺼지는 바람에 7시 반이 넘어 일어났다. ‘그래도’ 일어나서 바로 씻고, 명상도 하고, 빨래도 하고 나섰다. 보리는 동네 산책을 나가고 싶은지 차에 올라타는 시간이 점점 오래 걸린다. 나는 점점 동네 산책이 힘들다. 가고 싶지 않은 골목이 너무 많이 생겼다. 그러니 운전하기 조금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다가도 문 앞에서 차 키를 챙기게 되는 것이다. 바닷가에서도 평일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아무도 없이 고요하다. 가파도로 출발하는 배도 평일에는 조용한 것 같다. 아마 휴가철이 아니고서야 실제로 그럴 것이다. 승객이 없는 것이야 당연하겠지만, 기장의 안내방송도, 뱃고동 소리도 조용한 것 같다. 고요한 풍경이 좋아서 사진을 찍으려고 보니 휴대폰도 안 챙겨 나왔다. 집에 가는 길에 커피를 사 가려고 했는데.. 핸드폰이 없으니 오히려 풍경을 더 차분하게 즐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진을 찍는 게 오히려 풍경을 느끼는데 방해가 될 때도 있다. 귀여운 보리 모습을 남기지 못하는 건 아쉽고, 특별할 것 없는 하루도 사진으로 남김으로써 기억이 되고, 기록이 되기도 하지만, 귀여운 보리 모습이 담긴 사진도, 아름다운 바다 사진도 이미 많다.

게들의 오솔길을 지나 말라뮤트 진도 믹스 친구가 사는 집을 지나 숲 사이로 바닷가가 보이는 곳까지 다녀왔다. 원래는 돌아서 반대편 산책길로 가는 게 코스인데, 보리가 바닷가 쪽으로 너무 가고 싶어 하길래 못 이기고 해변을 걸어보기로 했다. 얼마 안 가 후회를 하긴 했다. 바닷물에 발 담그는 것 까지는 봐주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별로 덥지도 않은 것 같은데 물속에 배를 깔고 주저앉았다. 목만 내놓고 엎드린 셈이다. 앉더니 바닷물도 많이 먹었다. 목줄 세탁은 하고 싶지 않아서 조금 조마조마했다. 자기 요구가 조금씩 관철되자 약간 흥분도가 올라갔는지 바닷가를 뛰려고 해서 같이 뛰어줬다. 원래 보리 속도에 맞춰 뛰기 힘든데, 모래사장이라 보리도 속도가 많이 안 나서 그런지, 날 봐줘서 그런지 뛸 만했다. 그리고 당연히 물에 젖은 털에는 바닷모래가 잔뜩 붙었다. 목욕할 때가 지나긴 했지만, 오늘은 물로만 헹궈줘야지.

마당에 와서 보리를 씻기는데 물이 차가워서 다시 계절이 바뀐 걸 느꼈다. 여름에는 보리도 시원하겠지 싶어서 괜히 더 오래 헹궈주기도 했는데, 이제는 배에 물줄기를 갖다 대면 춥지 않을까 싶어 손으로 받아서 씻어줬다. 하모 해수욕장의 모래는 굵어서 잘 보이는 게 장점이자 단점이다. 눈에 보이는 모래들을 씻어내고, 요즘 가끔 ‘털어’를 연습해 보는데 언제 될지는 잘 모르겠다. 수건을 들고 나오니 보리가 좋아했다. 보리는 목욕 수건을 좋아하는 게 귀엽다. 수건에 몸을 자꾸 기대려고 해서 가끔 닦이는 게 좀 힘들긴 하지만..

귀여운 시간을 보내고 이제 집에 들어와야 하는데 보리가 안 들어오려고 했다. 아무래도 내가 하는 말에는 좀 더 버티고 보는 게 확실하다. 햇볕에 좀 더 말리라고 리드 줄을 풀어줬더니 그늘로 뛰어가 눈치를 봤다. 내버려 두니 집 앞으로 와서 기웃거리다 양지바른 곳에 앉았다. 오랫동안 먹고 있는 염소치즈 스틱을 줬더니 좋아하는 척 마당에 가서 버리고 왔다. 집에서도 자꾸 받아서 먹으러 가는 척 두고 오더니.. 이제 이별할 때가 된 모양이다.


광합성을 다 했는지 슬금슬금 집에 들어오길래 간식을 하나 줬더니 신나게 다시 마당으로 나가 먹고 온다. 간식을 다 먹고 나서 들어왔다. 이제야 마당을 제대로 쓰는데 떠나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아쉬워졌다. 날이 추워질 무렵에는 이사를 가야 한다. 어쩌면 울타리도 없는 마당 생활에 익숙해지고, 긴장이 풀리기 전에 떠나는 게 잘 된 일인지도 모르겠다. 오래 살 거라면 울타리도 마련하겠지만 언제 떠날지 모르는 집에 큰돈을 들이기가 부담스러웠는데, 막상 떠날 생각을 하니 한 번도 떠날 생각을 안 해 본 것처럼 막막하다. 어디서든지 작은 마당과 울타리가 있는 집에서 살 수 있겠지.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닐지라도, 구체적으로 꿈꾸고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당을 자유롭게 다니는 개를 보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마당이 있어도 쓰지 않고 사는 것에도 나름 만족했었는데, 마당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건 또 다른 차원의 행복이었다.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들이 많다. 아무리 상상을 해도 직접 경험하지 않고는 모르는 슬픔도, 행복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라도 일어나기도 한다. 슬픈 일이 생길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행복한 일이 생길 것을 기대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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