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옷을 서너 번이나 바꿔 입으며 나갈 준비를 했다. 두껍고 어두운 옷이 무거워 보인다. 입춘이 다가올수록 바깥바람도 무게를 덜어내고 한결 보드라워졌더라. 자연 가까이 사니 절기를 절감하게 된다. 서울에선 한 겨울에도 얇은 실내복으로 살았던 내가, 외투를 입고 방한 슬리퍼에 라디에이터를 켜고 겨울을 보냈다. 그러니 이 봄이, 입춘이 그저 반가운 거다.
휴일의 입춘날이라 큰절에 갔다. 예전에는 여러 풍속들을 치뤘던 중요한 날이지만, 지금은 사찰에나 가야 한 해의 시작이라는 '입춘맞이'를 하게 된다. 순천뿐만 아니라 인근의 광주, 보성, 벌교에서 그리고 더 멀리 창원, 대구에서도 오시는 보살님들이 어김없이 단정한 자세로 큰 법당에 앉아있다. 약속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모이고, 엊그제 만났던 사람들처럼 반가워하고, 조심히 사중의 안부와 절 아래 소식을 나누는 모습들이 법회날의 풍경이다. 점심 공양도 마치고, 동안거 기간이라 못 뵈었던 교무국장 스님께 차 한 잔 주세요.. 하고 찻방에 앉았는데, 소식을 듣고 보살님들이 하나 둘 오시더니 대여섯 사람이 둘러앉아 차담을 나눴다. 아직 꽃소식도 없지만, 상춘차회다. 마음자리를 닦는 분들이라 차맛이 봄맛이었다. 여전히 서울서 이 산골까지 온 나의 생활에 궁금함과 염려가 많다. 차회에서도 이것저것 <기획자의 집>에 대한 얘기가 오갔다.
지난 초여름부터 집을 고치고, 늦가을에 창촌으로 들어와 첫겨울을 지냈다. 공간을 짓는다는 일은 한 폭의 그림을 완성해 가는 것처럼, 이만하면 됐다 싶을 때까지, 고치고 다듬어 가는 과정이다. <기획자의 집>은 공사 일정도 타이트했고, 완공되기 전에 이사를 한 터라 살면서 다듬어갈 일들이 꽤 남았다. 11월 말에는 삐걱거리던 입구문을 왕창 뜯어내 재 시공을 하기도 했다.
잘 갖춰진 도시에서는 늘상 그 자리에서 편의를 제공하는 것들에 대해, 별다른 생각을 할 계기가 없다. 그런데 그 편의를 걷어내면, 하나하나가 생생한 삶의 문제와 의미가 된다. 이번 대문 재공사는 누군가는 '굳이..'라 했고, 누군가는 '반드시...'라고 했다. 비용을 떠나 이 정도의 큰 수정을 하면 어떤 프로세스를 겪게 되는지 알고 싶었다. 이상한 고집 같은 것이 발동해서, 일단 '해보자'하고 시작한 일이었다.
공간을 계획할 때 문은 공간의 기능, 흐름, 미학적 의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걸 글로만 알고 있었다). 문은 배치에 따라 건물의 다양한 구역이 상호 간에 접근과 순환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공간 사용자들의 경험과 흐름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프라이버시적 측면에서도 얼마나 중요한 설비인가. 형태적으로는 사용빈도나 방음, 방오, 방수에 자연광과 환기 등도 고려되어야 하는데 거기에 따라 미닫이문, 여닫이문, 폴딩도어 등을 결정할 수가 있다. 또한 문은 공간에서 면을 크게 차지하지 때문에, 시각적으로 집주인의 미적 감각이나 공간의 대표성을 표현하기 좋다. 소재, 손잡이 형태, 경첩의 모양 등 마감 스타일에 따라서도 공간 안팎의 전반적인 스타일링이 향상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들이 마구 구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규격 요건들 하에서 계획되어야 한다. 그래야 시공이 수월하고 이후 사용성에도 문제가 없다. 요약하자면, 문은 공간 계획의 기능적 구성 요소를 넘어 사용자가 건축 환경을 경험하고 참여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필수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더해서, 디자인과 배치는 실용적이고 미적인 공간을 만드는 데 중요한 고려 사항이라는 점!
(재공사한 입구문. 1way 방식의 폴딩도어 한쌍과 여닫이문으로 구성했다. 문을 활짝 열어야 하는 일이 있을 때를 고려해 전체가 다 열리는 구조로 만들었다. 이중창에 방한,방음 기능이 좋은 고급 소재로 했는데도 한기가 들어와서 뽁뽁이를 붙였다. 저 빨간색 도어락은 조율할 수 없는 선택이었는데, 디자인이 아쉽다. 문손잡이가 차가워서 가죽핸들을 둘렀더니 잡을 때마다 '어서 오세요'하는 느낌^^)
무문관(無門關)이라는 선불교 용어가 있다. 무문관은 'Gateless Gate'라고 하는데, 선 수행에서 추구하는 진리나 깨달음은 외부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며, 단순히 그것을 인식해야 한다는 뜻으로 설명되고 있다. 여기와 저기가 확연히 다른데 다르지 않고 지금 이대로의 그것이라는 '문 없는 문', 짧은 문장이 얼마나 깊어지는지... 그런데 불교뿐만 아니라 문에 대한 철학적 사고는 동서양 공통으로 '한계, 초월, 상호 연결' 등의 의미로 이어진다.
여느 시골 읍내 도롯가 가게들처럼 홑겹 샷시로 된 여닫이 문이, 조금 더 야무진 모양새로 새롭게 섰다. 이 오래된 마을 가운데 열리지 않을 것 같은 공간을 만드는 일, 새 문을 세우는 일, 그것이 얼마나 흥미로운 사건인지 저질러 본 사람은 안다. 한계-초월-연결의 재미로 여전히 어색한 마감들을 쏘아보는 중인데, 그래서 오늘도 언더컨스트럭션의 나날들...
<기획자의 집> 대문을 열고 들어서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얘기가 있다.
"아니, 이곳에 이런 공간이 있었네요!"
저 내밀한 공간에 대한 궁금증이 공간의 힘을 키운다. 압력밭솥처럼 잘 익은 무언가가 안으로부터 완성될 거 같은 기대가 생긴다. 어찌 보면 염원 같기도 한 그런 마음 마음들이 이 문에 잘 서리기를, 입춘방을 붙이며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