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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rderless Sep 22. 2024

사랑과 꿈을 찾는 29살

제주에서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다. 모든 인간관계가 그렇듯 지속성 있는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힘든 일이고 사람은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어쩔 수 없이 변하고, 기본적으로 이중적이면서 이기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나 또한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고 살다 보니 관계에 연연하지 않게 됐다.  마음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러다 금년 제주 여행을 통해 다양한 직군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짧은 기간 동안 속성으로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기대한 바는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상황적으로 이야기할 시간이 생겼을 뿐이었다. 카페 사장님, 국어선생님, 입학사정관, 29살의 젊은 청년이자 꿈 많은 친구, 독립서점을 운영하는 시인, 이제 막 요가 운영을 시작한 여사장님들, 관광 택시 기사님 까지 그들과 이야기 나눴던 내용들이 기억에 남는다.



사랑과 꿈을 찾는 29살


그중 기억에 남는 친구는 새벽 2시까지 대화를 나눴던 29살의 여자친구다. 20대가 힘든 이유는 주변에 멘토가 될 만한 어른이 없기 때문에 여러 방황을 하면서 꿈 자체를 포기하는 환경이 폭력적으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외로움에 친구를 많이 찾게 되고 그럴수록 스스로를 더 고독하게 만드는 상황이 생겨버린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정신적으로 기댈 곳이 없는 친구였고 어느 누구도 있는 그대로 자신을 칭찬해 준 적이 없는 모양이었다.


가끔 잘못된 상담사들은 어린 친구들에게 방법론적인 해결 방안을 제시하는데 그 방법은 좋지 않다고 본다. 자존감이 낮거나 누군가를 사랑할 줄 모르는 성격적 원인은 가족 환경과 부모로부터 나온다. 그런데 일방적으로 연애를 하라는 둥, 일을 잠시 쉬라 하는 식의 답이 말이 되는가. 1차적으로 상대의 아픔이 어디서 왔는지 근본적인 부분을 묻고 성장 배경을 아는 게 먼저다. 왜 20대는 그리도 힘든지. 정말로 어딜 가야 될지도 모르겠고 뭘 명확하게 잘한다 하기도 어려운 시기라 방황을 할 수밖에 없다. 특히 한국 사회 구조상 이공계 졸업생이 취업에 유리한 구조고 경제와 직결되지 않는 예체능, 인문학, 사회, 철학 등의 학과를 나온 사람들은 경력 파괴와 방황의 시간 자연스럽게 거치게 된다. 그게 내가 겪은 한국 사회의 현실이었다.


늦은 밤까지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당신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충분하고 앞으로 지금보다 더 잘 될 것이다'라는 말을 마음속에 심어주는 것이었다. 사랑을 진심으로 받아보지 못한 친구들은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도 모르지만 타인을 사랑하는 법도 모른다. 하지만 설령 그 방법을 모른다 하더라도 누군가가 '너는 가치 있는 사람이야. 있는 그대로 너를 사랑했으면 좋겠어'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 사람은 긍정의 말을 가슴속에 세기게 되고 다음을 도전할 수 있게 된다.


솔직히 내 개인적인 삶까지 말하면서 그것도 생전 처음 본 친구에게 따뜻한 말을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한편으론 연민이었고 그 친구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힘든 일이 다가와도 쓰러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대화를 길게 이어나간 것 같다. 나의 20대를 떠올려보면 무엇을 잘하는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어서 여러 곳에 문을 두드렸지만 그만큼 많이 거절당했고 과정 중에 자존감과 자신감이 떨어지던 시기였다. 다행히 그 기간 동안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알게 되었고 전공과 다른 직무의 재능을 힘겹게 찾았고 나 자신을 사랑하는 법도 배우게 되었다.



한국 사회에서 말하는 실패에 대하여


20대는 힘들다. 그렇다고 30대가 힘들지 않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내가 먼저 힘들었던 20대를 지나온 어른이라면 앞으로 30대를 맞이할 어린 친구들에게 조금이라도 따뜻한 말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을까. 과한 오지랖은 접어두고 상대의 직군과 사회적 현실을 반영한 현실적 대안을 제시하고 설령 선택한 길에서 원하던 길을 찾지 못했을지라도 괜찮다는 것을 알려준다면 그나마 마음의 무게가 줄지 않겠나. 한국은 실패에 관대하지 않은 나라여서 무엇을 하든 '이걸 해봤는데 잘 안 됐다' 정도로만 여기고 다른 길을 또 찾으면 되는데 '못 찾은 것'을 '실패'로 귀결 지어버리니 회복탄력성이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실패라는 단어가 사람을 움츠러들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패의 부담감이 큰 이유는 단순히 한 인간의 정신적인 이유를 원인으로 들어서도 안된다. 모든 건 '돈'과 직결되어 있다. 도전 대비 기회비용이 필요 이상으로 들기 때문에 단 한 번의 실수여도 무너지기가 쉽다. 그러니 어디 실패를 스스로 용납할 수 있겠는가. 실패에 관대해지는 대담함과 여유가 생기려면 국가적으로나 대학 내에서도 인큐베이팅 시스템이 잘 되어있어야 되는데 아직까지는 그런 상황이 되지 않으니 졸업생들은 사회에 나가자마자 타박상이 아니라 교통사고를 당하는 격이다. 꼭 졸업생이 아니더라도 30대, 40대, 50대는 적정선에서 사회와 타협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도전을 운전에 비유한다면 먼저 운전대를 잡아야 되는데 사전에 사고 날 것을 걱정해서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또 사회가 이렇다하여 모든 걸 사회 탓 혹은 부모 탓으로 돌려서도 안된다. 조금 더 성숙하게 나가려면 '사회는 이렇고 내 현실은 이렇지만 나는 나대로 내 길을 찾아갈 거고 당신들이 어떤 방식으로 날 바라보든 내 길을 간다'의 마인드로 세상을 살아가야 된다. 누구의 탓도 하지 않고 살다 보면 언젠간 아무리 비 포장도로고 비가 오고 눈이 와도 견뎌낼 수 있지 않겠는가. 인생은 남 탓을 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단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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