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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인 Dec 07. 2023

대전의 다른 이름 성심당

올겨울 대전에 가야 할 이유


올 한 해 제주에 살다가 서울에 올라온 이후 생각보다 국내여행을 많이 하지 못했다. 전라도에서는 목포, 함평, 순천, 완주에 다녀왔고, 강원도에서는 강릉, 평창, 동해, 충청도에서는 태안, 서산, 공주 그리고 대전에 다녀왔다.


대전을 마지막으로 방문했던 기억은 대전 엑스포 공원의 과학관에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아이들과 함께 과학관에 가면 과학적 지식도 얻을 수 있을 것이고, 대전의 과학관에는 좀 더 특별한 것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기대했던 대전의 과학관은 다른 여타의 도시의 과학관과 큰 차이가 없었고, 1990년대 엑스포시절에 지어진 곳이라 시설이 조금 낡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것이 대전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었다.


올해 대전을 방문한 이유는 다름 아닌 빵집이었다. 빵지 순례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전국의 빵 맛집을 투어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한국의 빵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 빵을 먹으러 어느 지역을 방문한다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참고로 나에게 최고의 빵은 어느 프랑스 시골 동네 빵집에 갓 구워져 나온 단돈 천원도 안 되는 바게트였다. 완주에서 일정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어느 도시를 들를까 고민하다가, 여러 후보 가운데 대전을 고른 이유는 '성심당'이다.


노잼도시 대전을 빵의 도시로, 꿀잼 도시로 바꾼 성심당에 직접 가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오랜만에 대전을 찾았다. 지도앱에 성심당을 찍고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서울의 명동거리를 연상케 하는 대전의 원도심 지역이 가까워졌다. 더 이상 차를 갖고 가기가 민망할 정도 사람들의 통행이 빈번한 거리라 근처 고층빌딩 지하 유료 주차장에 대충 주차를 하고 성심당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눈길을 뜬 것은 성심당에서 만든 파스타전문점 삐아또를 마주한 것이다. 대전 원도심 전체가 성심당 거리라더니 그 위상을 느낄 수 있었다. 레스토랑을 뒤로하고 오른쪽으로 꺾으니 사진으로만 봐왔던 성심당 본점 건물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6월에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수십 명의 인파들이 매장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고, 성심당에서는 무더위의 손님들에게 초록색의 파라솔을 대여해 주는 편의를 제공하고 있었다.


‘아, 여기가 바로 성심당이구나.’


긴 줄 서기를 극도로 싫어하는 나는 남편을 줄에 세우고 아이들과 함께 근처 성심당의 다른 건물로 눈길을 돌렸다. 본점 앞의 성심밀방앗간에서는 대형 제빙기가 ‘사각사각’ 얼음을 갈고 있었고, 최초로 포장빙수를 만들었다는 문구가 크게 쓰여있었다. 무더위에 빙수를 사려는 사람들도 긴 줄을 서고 있었고, 다시 발길을 돌려 '성심당 문화원'으로 향했다.


다행스럽게도 '성심당 문화원'은 사람들의 관심이 미치지 못해 매장이 붐비지 않았다. 매장 1층에는 성심당 굿즈가 있었는데 빵모양의 수세미처럼 빵을 테마로 귀여운 기념품도 만들어놓았고, 동아연필과 합작으로 만든 연필 ‘흑심 x 빵심’도 공동상품으로 만들어 놓았다. 오래되었지만 가치 있는 상품을 만드는 두 브랜드의 상품이었다.


1층을 뒤로하고 위층에는 무엇이 있나 눈길을 돌렸을 때 '이곳을 가지 않았으면 성심당을 제대로 보지 못했겠구나', 인파를 뒤로하고 이곳을 찾은 나 자신을 칭찬하게 되었다. 성심당 갤러리에는 성심당의 스토리를 직접 연필로 그린 삽화로 하나하나 전시하고 있었고, 백여 장이 넘는 종이 삽화는 성심당의 스토리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성심당의 창립이야기를 자세히 알고 싶으면, 책 <우리가 사랑한 빵집 성심당>을 읽으면 좋다.


짧게 이야기해 보자면 이렇다. 함경남도 함흥 인근에 살던 성심당 창업주 임길순은 천주교를 믿는 집안에서 자라왔고, 6.25 전쟁 당시 미군이 북한에서 몇 개월 만에 철수하게 되면서, 남쪽으로 피난을 가기로 결심한다. 미군이 있던 흥남부두에는 이미 10만 명의 피난민이 영하 30도의 추위 가운데서 남한으로 피난 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기다리고 있었다. 피난민들은 공무원이거나 미군과 관련이 있는 순으로 먼저 배에 올라탈 수 있었고, 철수 마지막날 하나의 군함이 남은 상황에서도 흥남부두에는 1만 4천 명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그때 미군 라루 선장이 배에 있던 모든 미군 군사 물품을 버리고 남은 피난민 모두를 데리고 남한으로 오게 된다. 이 배에 올라탄 임경순도 ‘이번에 살아날 수만 있다면 평생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살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처음 경남 진해에 도착해서 냉면집을 하다가 경부선 기차가 생기자 서울에 정착하기를 결심하고 기차에 올랐다. 가다가 기차가 고장 나서 대전에 내리게 된다. 이때 기차가 고장 나면 새로운 부품으로 교체하고 고치는데 며칠씩이나 걸리게 되는데 그 참에 대전에 정착하게 된다. 아는 사람 하나 없던 대전에서 대흥동 성당에 찾아갔더니 신부님께서 밀가루를 주셨고, 그 밀가루로 대전역 앞에서 찐빵을 만들어 팔던 것이 성심당의 시작이다. 성심당의 성심도 예수님의 마음을 뜻한다. 이처럼 이웃에게 나눔의 가치를 실천하기 위해서 빵집을 운영하면서, 대전 지역사회에 자리 잡았다.


성심당이 이처럼 대전을 대표하는 로컬 브랜드로 자리 잡는 데는 천주교가 핵심가치로 작용했다. 하느님께 살려만 주신다면 평생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살겠다고 약속하고 평생 그 가치를 실천하며 성심당을 꾸려왔다.


성심당이 특별한 또 하나의 이유는 지역사회에 대한 공헌이다. 성심당은 한때 큰 화재로 공장과 매장의 많은 부분이 소실되며 폐업할 위기에 놓였는데, 이때 성심당 직원들이 힘을 합쳐 성심당을 다시 일으키고 대전 시민들은 다시 일어선 성심당에 더 많이 방문하고 빵을 구입하여 성심당에 지지를 보냈다. 성심당이 천주교 가치를 실천하며 이웃에게 나눠주는 실천을 해오자, 대전시민들도 성심당의 진정한 팬으로 위기의 성심당을 살려낸 것이다.


성심당 문화원의 전시에도 성심당과 관련한 대전시민들의 일화가 많이 담겨있다. 시아버지가 성심당 식빵을 아침식사로 고집하셔서, 매일 성심당 식빵을 사 와야 했던 며느리가 어느 날 다른 빵집의 식빵을 사갔더니 시아버지가 빵맛이 다르다며 화를 내셨다는 에피소드가 기억에 남는다.


마지막으로 성심당이 대전을 빵의 도시로 만든 이유는 그 맛이다. 튀김소보로는 성심당 임영진 대표가 고심 끝에 만든 특별한 빵이다. 그 외에도 한국에서 두 번째로 생크림 케이크를 만들고, 최초로 포장빙수를 개발했다. 단순히 오래된 빵집이 아니라 오랜 시간 기술발전을 해오며 성심당만의 빵맛을 개발해 왔다.


대전 성심당에 방문해서 가장 놀랐던 것은 그 빵맛이었다. 한국에도 지역마다 가장 오래된 빵집들이 몇 군데 있지만, 개인적으로 성심당처럼 맛있는 빵을 만드는 곳은 보지 못했다. 성심당의 메뉴도 과거에 정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요즘 세대들의 입맛에도 맞는 다양한 빵 메뉴가 개발되어 있다. 다양한 빵들이 하나같이 맛도 좋다는 점에 성심당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다.


지역마다 고유한 가치를 담고, 지역의 재료로 만든 로컬 브랜드가 많아지고 있지만, 성심당이 한국을 대표하는 로컬 브랜드임에는 성심당의 특별한 가치와 지역 사회공헌, 뛰어난 빵 맛에 있다.


이번 겨울에도 대전에 가고 싶다. 물론 성심당이 그 이유다.


#글루틴 #팀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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