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 배우러 갔다가 알게 된 것들_06
수영을 배울 거란 계획을 말했을 때 친구가 말했다. “아줌마들 텃세 조심해.” 수영을 배운 적 있는 그의 말이었기에, 나는 약간의 긴장감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영장에 가 보니 정말 40~60대로 보이는 여성들이 많았다. 나보다 어리거나 비슷한 또래는 몇 명 보이지 않았다. 처음이라 낯설기도 했고, 친구의 조언도 있었던 터라 괜히 눈치를 살피게 됐다.
각자 수영 연습을 하는 수업시간은 괜찮았다. 문제는 샤워실이었다.
샤워실은 늘 만원이었다. 수영뿐 아니라 헬스, 줌바댄스, 필라테스 등을 하는 스포츠센터의 여성 회원들이 모두 모이는 곳이었고, 모든 수업이 끝나는 매시 50분에 한꺼번에 사람이 몰렸다. 대부분 자리가 없어 나는 씻는 사람들 뒤에 엉거주춤 서서 눈치만 봤다. 하지만 오래 기다린다고 자리가 생기는 건 아니었다.
‘즉시 샤워’를 위한 프리패스 2가지가 있는데, 친한 사람 혹은 샤워 바구니다. 샤워를 마친 사람이 친한 사람에게 자리를 물려주거나, 수업 전 샤워 바구니로 맡아 놓은 자리에 가서 씻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둘 다 없는 나는 수압이 매우 약하거나, 앉아서 씻는 자리인데 의자가 없어서 사람들이 기피하는 자리에 가서 샤워할 때가 많았다.
운 좋게 서서 샤워하는 곳에 자리를 잡으면 너무 자연스럽게 밀고 들어오는 중년 여성들도 있었다. 내 자리 선반에 자신의 짐을 놓은 후 내가 바디클렌저를 바르는 동안 샤워기로 몸을 적신다. 붐비는 시간이니 한 샤워기에서 번갈아 씻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들의 태도가 불쾌했다. 원래부터 자기 자리였다는 듯 슬금슬금 센터를 차지하고 나를 옆으로 밀어낸다. “괜찮으면 샤워기 좀 같이 쓰자”는 양해의 말은 당연히 없다. 가장 화가 나는 건 뒤에서 조용히 기다리던 다른 여성들, 주로 센터를 다닌 지 얼마 안 돼 보이는 여성들이 그런 사람들에게 번번이 새치기를 당한다는 거였다.
더 노골적인 무례도 있었다. 샤워실과 사물함 사이의 경계 공간에서 수건으로 몸을 닦고 있을 때였다. 내 앞에서 수건을 가로로 길게 들고 등을 탁탁 내리치며 닦던 아주머니의 수건이 내 얼굴을 때렸다. 그 아주머니는 나를 흘긋 돌아보더니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사물함으로 걸어갔다. 내 수영복을 넣은 탈수기가 맹렬하게 돌아가는데도 “다 됐다”며 손으로 통을 멈춰 자기 수영복을 넣던 중년 여성, 앉아서 씻는 자리지만 의자가 없어서 서서 샤워를 하는데 “물 튀긴다”며 짜증을 내던 저 멀리 앉아있는 할머니.
서로 이름을 부르거나 언니, 언니 하며 등을 밀어주고 음식을 나누는 아주머니들. 서로에겐 한 없이 넉넉하되 낯선 이에겐 이토록 엄격한 것이 텃세의 본질인가 싶었다. 나는 사소한 실수로 그들의 노여움을 사지 않도록 더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그런데, 내가 틀렸다.
여느 때처럼 샤워할 자리가 한 곳도 없는 날이었다. 샤워 가방을 들고 서성이는데 뒤에서 누가 내 등을 두드렸다. 샤워실에선 늘 긴장하고 있었기에 경계심부터 들었다. 돌아보니 한 중년 아주머니가 웃으며 “나 다 씼어으니까 이리 와요”라고 손짓했다. “감사합니다” 나도 웃으며 그 자리로 갔다. 자리를 내어준 것이, 내게 웃어주신 것이 고마웠다. 그런데 곧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왜 내 등을 두드리는 손짓에 경계하는 마음부터 들었던 걸까. 노여움 운운하며 아주머니들 전체를 경계한 것 자체가 ‘나 = 순진무구한 피해자’이며 ‘아주머니들 = 잠재적 텃세 가해자’로 전제한 것이었다. 그리고 자리 선점이라는 오랜 불합리와 몇 명의 무례를 중년 여성 전체의 잘못으로 확대해 샤워실을 ‘위험한 곳’이라고 단정지어버렸다.
그날 샤워기 아래서 그동안 내가 받았던 친절들이 떠올랐다. 수영 첫날 준비운동이 끝난 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동공 지진 겪는 나를 알아보고 “처음 왔어요? 저쪽에 가서 기다리면 선생님 나올 거예요” 먼저 알려준 중년 여성이 있었고, 등에 비누 거품이 묻었다며 수영장 물로 등을 닦아준 분도 있었다. 샴푸를 가지고 오지 않은 날 흔쾌히 빌려주던 아주머니, 탈수가 끝난 수영복을 꺼내 주는 아주머니들도 있었다. 텃세 레이더망 가동에 온 에너지를 쏟느라 금세 잊어버리고 말았던 작은 친절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은 어디나 그렇듯, 수영장에도 친절한 사람과 무례한 사람이 뒤섞여 있을 뿐이었다. 내가 겪은 무례는 텃세가 아니었다.
수영장에서 타인에게 불쾌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꼭 아주머니일리는 없는데 ‘수영장 텃세’가 아닌 ‘아줌마 텃세’로 명명된 것은 아무래도 수상하다. 중년 여성들이 수영장에 많이 다닌다는 사실과 지하철 문이 열리자마자 빈자리로 슬라이딩하는 ‘이기적이고 뻔뻔한 아줌마’ 이미지를 합쳐서 만든, 또 하나의 의도적인 편견은 아닐까. 물론 아주머니들이 다른 신입 회원을 괴롭히는 수영장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역시 그 몇몇 아주머니들의 잘못된 인성을 탓할 일이지 ‘아줌마 텃세’로 일반화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소수의 잘못이 집단 전체의 부정적인 이미지로 고착되는 건 사회적 약자들이 자주 겪는 폭력이다. 그런 폭력은 “000 조심해”라는 걱정, 조언의 탈을 쓰고 일상에 스며든다.
내가 조심했어야 하는 건 아줌마 텃세가 아니라 조언의 탈을 쓴 폭력에 대한 끄덕거림이었다.
아줌마는 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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