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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뜨기 Sep 06. 2020

어제의 길라잡이가 오늘 길을 잃어버렸다

아버지

아버지와 아들 사이는 어떤 끈으로 연결되어 있을까? 든든한 생명줄이지만 때론 버거운 올가미이기도 하다. 떼려야 뗄 수 없는 어비아들, 누구나 그렇겠지만 우리 형제들에게도 아버지는 특별한 존재다.


지금은 사진으로밖에 만날 수 없는 아버지, 가장 갈등이 많았던 작은형이 우리 삼 형제 중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뵈었다. 집에서 투병 중이신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하루 전 날, 왠지 모를 느낌에 작은형은 서울에서 고창까지 내려와 아버지의 손을 잡고 기도하며 사랑한다고 말했었다.




작은형이 전하는 아버지에 대한 어릴 적의 한 추억이다. 

부모에게 있어서 자식의 교육보다 더 큰 관심이 있을까? 젖 뗄 무렵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아버지는 학교는커녕 어릴 적부터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느라 배움의 기회가 없었다. 그런 아버지도 자신이 아는 것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식에게 알려주려 하셨던 것이다. 


고창 수박의 주산지는 대산면 칠거리라는 지역에서 시작됐다. 박정희 대통령이 농촌을 살린다며 시작한 새마을 운동의 드센 파고는 마을 주변의 숲정이들을 모두 야산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채마밭으로 만들었지만, 우리 동네인 섬말에서 칠거리까지 이르는 신작로는 중간에 마을 하나 없이 메숲진 곳이라 한낮에도 칙칙한 느낌을 줄 정도였다. 


칠거리는 길이 일곱 갈래인 곳인데 마을은 아니며 드문드문 서너 집이 있을 뿐이다. 주변 마을이 이쪽을 통해 대산장을 다니므로 그곳에는 이발소와 점방을 겸한 집, 뱀 잡는 땅꾼의 집, 그리고 나중에 들어선 자전거포가 있었다. 


그날 아버지는 이발하러 가자시며 작은형을 채근하셨다. 이발소는 바로 앞 동네에도 있는데 굳이 칠거리까지 먼 길을 고집하는 것은 같은 집안의 아저씨뻘이 운영하는 이유였을 게다. 아마도 작은형이 학교를 다니지 않는 나이었거나 휴일이었을 게다. 나도 여러 번 가 본 그 이발소를 아버지와 작은형 단 둘이서 어색하게 길을 나선 것이다. 그전까지 길바닥엔 잡초도 푸르더니 신작로는 벌건 흙들과 자갈들만 내보이며 숲으로 숲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오, 자네 왔구먼. 이발하려고?"

"예, 아제. 우리 애도 해주시요."


아버지는 먼저 이발을 하시고 동백기름인지 포마드인지를 바르고 나가셨다.

"이발하고 있어라. 내 잠깐 딴 데 다녀올 테니."

차가운 이발기가 밤송이 같은 작은형의 머리털을 잘도 헤집고 다니더니 어느새 빡빡머리로 둔갑을 시켰다. 세면대에서 머리를 감은 후 작은형은 바깥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며 서성이고 있었다. 점심시간도 넘었는지 식사를 하고 나온 이발사는 작은형을 보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으셨다.

"뭐하느라 아직 안 갔냐?"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촌뜨기는 그제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아부이가 데리고 간다고 했어라-"


"먼 소리냐. 이발하자마자 너 보고 혼자 오라고 말하고 갔는디."

"............"


다른 토도 달지 못하고 작은형은 집으로 돌아갈 방법을 강구했다. 그날따라 동네에서 이발하러 온 사람도 없어서 결국은 혼자서 동네를 찾아가야만 했었다. 길이야 따라가면 그만이지만 길섶의 파헤쳐진 무덤들이나 사람 하나 다니지 않는 호젓한 산길은 어린애에겐 겁만 안겨주는 곳이었다.


솔방울 떨어지는 소리에 움찔하니 인적에 놀란 꿩이 놀란 티를 내며 날아갔다. 신경이 곤두서다 보니 아까부터 숲에서 계속 바스락거리는 소리들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무섬증이 왈칵 들어 몇 발자국은 달음박질을 하였지만 곧 숨이 차서 포기했다.


작은형은 그때부터 노래를 불렀다. 아는 노래가 별반 없다 보니 아마 나중에는 아예 울음반 노래반으로 계속 주위의 고요를 깨트리고자 했던 것 같다. 멀기만 했던 길도 땔감을 하러 형이랑 왔던 낯익은 지점까지 오니 이젠 울음이 조금씩 멈춰졌다. 완전히 무서움이 간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동네 가까이 오니 안심이 되었다. 동네 사람 하나가 저쪽에서 지게를 지고 왔다. 소매로 눈물을 훔친 후 그 사람이 다가오자 꾸벅 절을 했다.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세나지'라는 갈림길에서 집까지 잇대어진 내리막길을 줄달음에 달려 싸리문을 열었다. 동네에서 제일 위에 위치한 우리 집엔 마침 큰형도 학교에서 오고 어머니도 동네 아낙 두엇과 마당에 곡식을 널고 있었다.


"아~앙."

여름날 풍뎅이가 매암 돌듯이 작은형은 마당에 등을 댄 채 빙빙 돌며 온갖 설움을 토해내듯 울어댔다.


"아부지가....아부이가....아~앙."

이상한 것은 그렇게 섧게 우는데도 어머니나 큰형은 달래주는 척만 하고 재밌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모습에 더 서럽게 땅바닥에서 뒹구는데 머릿기름이 채 마르지 않은 아버지가 싸리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둘째야. 나 숲길에서 계속 널 뒤따라왔다. 네게 길을 알려주려고 일부러 그런 것이다."

아버지와 식구들은 무엇이 그리 좋은지 작은형의 울음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더 호방하게 웃었다.


그때의 아버지 나이는 지금의 우리 형제들보다 더 젊었었다. 자식에게 길을 안내하던 아버지는 나이가 드시자 본인이 자꾸 길을 잃으셨다. 면소재지에서 술을 거나하게 드신 날이면 집을 찾지 못해 헤매시는 것을 경찰차가 모시고 오는 때가 종종 있었다. 어린 아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숲길은 젊은 아버지가 뒤에서 봐주셨지만, 늙은 아버지의 취한 하룻길은 누가 길라잡이가 되어줄까?


이제 아버지는 더 이상 길을 잃어버릴 일이 없는 하늘나라에 계신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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