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 난 자동차
내 차가 말을 잃었다.
앞 차가 갑자기 서도, 옆 차가 끼어들어도 도통 짖질 않는다.
차가 소리 지르지 않으니 때론 내가 차 창문을 내리고 고개를 내밀며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집으로 가는 골목길에 접어드는데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학원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이 들어 골골거리는 내 차는 그렁그렁 굴러가기에 차 기척을 알아챌 텐데,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떠드느라 내 차의 접근을 알아채지 못해 길을 내주지 않았다. 운전석의 차창을 내리고 아이들에게 비켜달라고 소리를 지르려고 하니, 성질 급한 뒤차가 빽빽거려서 아이들을 흩트렸다.
내 차가 소리를 지르지 않는 것은 양반이라서 체면 차리는 게 아니다. 소리 내고 싶어도 못 내는 거다. 언제부턴가 목쉰 거위처럼 소리가 잠기더니 아예 침묵했다. 경음기가 고장 난 거다. 올봄에도 경음기가 고장 나서 새로 갈았었는데 또 망가진 것이다. 차가 만들어진 지 14년이 되다 보니 잔고장이 심했다. 이참에 침묵기도 하듯 침묵운전이나 해 볼 요량으로 그대로 차를 몰고 다녔다.
세상은 너무 시끄럽다. 특히 차가 많은 도로는 오리 떼를 풀어놓은 양 시끌벅적거린다. 앞 차가 조금만 머뭇거려도 빽, 옆 차가 끼어들려 해도 빽빽. 큰 차는 더 큰소리로 위협하며 빠방 나팔을 분다. 운전을 하다 보면 집단 심리에 홀리는가 보다! 너도나도 필요 이상 차 나팔을 불어댄다. 조급함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운전문화의 단면이다.
경음기가 고장 난 차를 몰다 보니 저절로 방어운전을 하게 되었다. 앞차와의 간격을 유지하고, 신호등이 바뀔 때 무리하지 않았다. 소리 잃은 차를 몰다 보니 소리 내야 할 때 소리 못 내는 언어장애인이 느낄 갑갑함을 조금은 알 수 있었다.
달포 가량 묵언수행(?) 자동차를 운전하다가 정비소에 가서 자동차 나팔을 고쳤다. 잠깐은 괜찮을지 몰라고 경음기 고장 난 차를 계속 운전하는 것은 위험하고 불편하다. 수리가 불가능하다면 모를까 간단히 정비할 수 있는 경음기는 제대로 수리하여 운행해야 한다.
말 많은 세상인데 정작 할 말은 '안 하는' 세상이다. 직장에서는 동료의 부정을 의리라는 이유로 입 다물고, 경제의 전망자들은 사회불안을 이유로 분석자료를 곧이곧대로 발표하지 못하고, 종교지도자들은 지상낙원에 만족하여 천국이 가까움을 외면한다. 꿀 먹은 벙어리다.
우리는 자기 자리에서 그 자리에 맞는 소리를 내야 한다. 피아노의 도 건반은 도를, 미 건반은 미를, 솔 건반은 솔을. 할 말은 하고 때론 고함도 질러야 한다. 자녀의 아버지로서, 학생들의 선생님으로서, 성도들의 목자로서, 시민의 대표로서, 직장의 상사로서, 지역의 어른으로서, 모임의 대표로서 그리고 그저 한 사람으로서.
운전할 때 앞 차가 미적거리고 옆 차가 새치기를 하더라도 어지간하면 경음기를 울리지 않겠지만, 앞 차가 졸음운전하거나 안전운행을 못할 때는 경음기를 울려야 한다. 경음기를 울리지 않으면 교통사고가 날 수 있다. 교통사고가 나면 고속도로는 마비된다. 소리 내야 할 때 소리 내지 않으면 이럴 수도 있다.
침묵은 금이지만 때론 금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