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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뜨기 Jul 01. 2020

먹는 게 가장 행복했다

먹거리

먹는 게 가장 행복했다. 그땐 그랬다. 

먹거리는 개학 후 만나는 친구처럼 마냥 반가웠다. 친구 얼굴이 까매졌든 하얘졌든, 머리카락이 자랐든 잘렸든 달포만의 만남은 호들갑스러웠다. 검은 고양이든 하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되듯 고픈 배를 달랜다면 맛은 상관없었다. 밥때가 되어 뭐라도 끼니를 때우면 그지없이 행복했다. 거지의 행복이다. 행복은 손 내밀어 더듬으면 잡히는, 그렇게 가까이에 있었다. 손 안의 구슬처럼 딱지처럼, 그저 가진 것만으로도 남부럽지 않은 부자였다. 


촉촉이 비 오는 날엔 칼국수가 인기다. 어르신들 중에는 칼국수를 싫어하는 분들이 있다. 배고픈 시절 질리도록 먹어서 지긋지긋하여 거들떠보기도 싫다는 거다. 그러실 수 있다. 나도 그렇다. 근데 그렇지 않다.


나도 질리도록 먹었지만 지긋하지는 않다. 어르신이나 나나 같이 배곯았고 칼국수를 먹었지만 내 기억은 행복이다. 이 기억의 차이는 처지의 차이다. 그때 나는 어렸고 어르신들은 어른이었다. 아이는 밥이든 죽이든 눈앞에 차려주기만 하면 좋았다. 어른들은 그것이라도 구하려고 애쓰고 맘 졸이며 갖은 고생을 했을 것이다. 아마 그 차이가 아닌가 싶다. 나는 어르신들과 다른 기억으로 그 음식을 추억하고 있다. 


이따금 칼국수를 먹으러 간다. 어릴 적의 추억을 떠올리기 위함도 있다. 지금의 칼국수는 그때보다 훌륭하다. 국물맛 내는 다시가 그렇고 면에 올리는 고명이 그렇다. 그땐 특별한 다시와 고명이 없었다. 그저 팥, 콩, 들깨 국물이었다. 지금의 칼국수는 사골, 바지락으로 국물을 낸다. 그땐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얘기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만큼 맛있게 먹지는 못한다. 맛이 없어서라기보다는 그 맛을 못 느낀다.


그때가 더 맛있었다고 생각하는 나의 기억은 진실이 아닐 것이다. 진실이 아님을 알지만 굳이 따질 생각도 없다. 사람의 감각은 생각보다 잘 속는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처럼, 사람에겐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인다. 난 일부러 내게 속는지도 모른다. 지난날의 내 감각이 지금의 내 감각을 속이는데, 부러 속아주는 것이다. 손주의 거짓말에 속아주는 할아버지처럼 허허 하며 눈감아주는 것이다. 그렇게 속으면서 난 어릴 적의 행복을 유지하고 있다. 속은 대가로 추억을 간직할 수 있다면, 난 계속 속으련다.


지금은 그 맛을 찾을 수가 없다. 그 맛은 머릿속 기억에 오롯이 자리한 추억이다. 맛을 느끼는 것은 입속 혀의 미뢰로만 느끼는 것이 아니고, 머릿속 뇌의 해마 기억으로도 느낀다. 배고픈 추억도 행복한 추억이다. 내 어릴 적 추억은 먹는 것이 마냥 행복한 해맑은 소년이다. 배고프니 행복하다는 말은 배부른 소리일지 몰라도, 그때 나는 그랬다. 어릴 적 그때는. 행복은 꿀단지에 꿀을 꾸역꾸역 채우는 맛이다. 가득 찬 것의 흐뭇함도 있지만 채워지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이 재미는 빈 단지일수록 크다. 많이 먹어 배부른 것도 기쁨이고, 적게 먹어 맛있게 먹는 것도 기쁨이다. 배고픔이 행복은 아니지만 배고파도 행복했다. 배고파서 음식이 맛있었던 추억은 별미 상차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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