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눈질
볍씨는 언제 뿌리고, 모는 언제 심을까?
사위를 살펴보자. 하루 중 나무 그림자가 가장 짧으면 해가 내 정수리에 머문 정오다. 한 달 중 밤이 가장 밝으면 달의 끌림이 가장 센 보름이다. 한해 중 낮의 길이가 가장 길면 태양이 가장 높게 뜬 하지다. 낮에 뻐꾸기 소리 들리면 여름 오는 때요, 밤에 귀뚜라미 소리 들리면 가을 오는 때다. 봄이면 들판에 아지랑이 아른거리고 가을이면 강가에 물안개 자욱하다. 이렇게 주변을 둘러보면 때를 알 수 있다. 이 때는 자연의 때다. 자연의 때는 생명의 때다. 볍씨에 머물던 생명은 벼 자람을 따라 이어간다. 생명 품은 생물은 때 따라 나고 때 되면 간다. 언제 볍씨를 뿌리고, 언제 모내기를 할까?
농부 몸 안에는 옥신 호르몬이 있는 듯 빛에 순순히 반응한다. 어슴새벽 홰치는 수탉처럼 동트기에 저절로 몸이 깬다. 식물이 해를 바라는 해바라기이듯 농부도 해를 따르는 해따라기다. 직장인은 추분 때나 동지 때나 9시에 맞춰 출근하지만, 농부는 춘분 다르고 하지 다르게 들에 나선다. 농부의 하루는 날이 밝으면 시작한다. 이 시작은 벽에 걸린 시계가 아니라 동녘의 해돋이다.
해토머리, 묵묵하던 땅거죽이 들썩이더니 여기저기서 비죽비죽 싹이 오른다. 이들은 몸에 스미는 따신 기운 따라 눈을 뜨는 것이다. 이에 따라 알에서 깨어난 벌레는 물 오른 순을 먹고, 둥지 튼 새들은 살 오른 벌레를 잡아먹는다.
농부는 여러 작물을 기른다. 그중에 식량인 쌀을 얻기 위해 벼를 키운다. 벼는 가장 기본적인 농작물이다. 그 해의 작황에 따라 죽살이가 달렸다. 원시시대 불꽃어멈이 불씨를 다르듯 씨알은 소중한 것이다. 그래서 ‘농부는 굶어 죽어도 종자를 베고 죽는다’라는 속담이 생겨났다.
볍씨는 다음 삶을 보장하는 알짜다.
소중히 다뤄야 할 보물이다. 동굴에서 불씨를 살리듯 볍씨를 틔워 모를 기르는 것은 성스런 생명의식이다. 모를 길러 모내기를 하면 그제야 한숨을 돌릴 수 있다. 불씨가 땔감에 불꽃 번지면 이어서 스스로 잘 타오르듯 어린모를 논에 옮기면 새 가지를 내며 들불 번지듯 포기를 번다.
볍씨는 언제 뿌리고 모내기는 언제 할까? 지역 따라 품종 따라 차이지지만 중부 평야지에서 중만생종을 심을 때 4월 중순에 볍씨 뿌리고 달포 후인 5월 중순에 모를 낸다.
그즈음에 주변을 둘러보면 하얀 꽃들이 눈에 찬다. 조팝나무와 이팝나무 꽃이다. 농부는 흰 꽃을 보고서 흰쌀밥을 떠올린다. 보릿고개를 넘던 어르신들은 신기루에 홀리듯 흰 꽃을 하얀 쌀밥으로 여겼다. 입에 담지 못하는 쌀밥을 눈으로나마 실컷 담으며 헛헛증을 달랬으리라.
하얀 조팝나무와 이팝나무는 그 이름을 밥에서 따왔다.
조팝나무는 원래 조밥나무인데 세게 부르다 보니 조팝나무로 굳어졌고, 이팝나무 역시 이밥나무인데 세게 부르다 보니 이팝나무로 굳어졌다. 둘 다 밥나무다.
먼저 조팝나무를 보자.
잡곡밥은 쌀밥에 각종 잡곡을 섞어 지은 밥이다. 콩을 넣으면 콩밥이고 보리는 넣으면 보리밥이다. 조밥은 하얀 쌀에 노란 조를 넣어 지은 밥인데, 조팝나무의 꽃 모양이 마치 조밥 같다. 조팝나무의 꽃잎은 쌀밥처럼 하얀데 가운데의 수술과 암술은 노래서 흰쌀밥에 노란 조가 섞인 조밥처럼 보인다. 또한 잔가지에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붙어 핀 조팝꽃은 꿀 바른 나무막대에 뻥튀기한 하얀 튀밥을 붙여놓은 듯 소복하다. 조팝나무는 조밥나무다.
다음 이팝나무를 보자. 이밥은 쌀밥이다. 쌀이 귀했던 조선시대에는 쌀밥은 이 씨(李氏) 왕족이나 양반들이 먹는 밥이라는 뜻으로 이밥이라고 불렀다고도 전해진다. 지금도 북한에서는 쌀밥을 이밥이라고 부른다.
이팝나무의 꽃 피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그해 농사를 점쳤다. 입하 무렵 이팝꽃이 한꺼번에 활짝 피면 풍년이 들고, 잘 피지 못하면 흉년이 든다고 여겼다. 눈이 덮이듯 커다란 나무를 뒤덮은 하얀 이팝꽃을 보면서 쌀 가득 안은 풍년을 바라는 농부의 기원이었으리라. 농경지가 많은 전라도와 경남지방엔 마을 정자수로 이팝나무를 심은 것은 이런 바람이다.
천연기념수로 지정된 이팝나무는 전국에 일곱 그루가 있는데, 내 고향 전북 고창의 중산리에도 250살 된 천연기념물 183호 이팝나무가 있다. 나무가 활짝 필 때 마을 어귀에 들어서면 커다란 고봉밥이 떠올랐다. 그때는 한창 들에서는 모내기를 하던 때였다. 모를 찌고 모춤을 듬성듬성 논바닥에 던져놓은 모습들이 떠오른다. 지금은 볼 수 없는 내 기억 속에 바랜 흑백사진처럼 자리한 정겨운 풍경들이다.
시골마을 정자수로 심겼던 이팝나무가 근래에는 도시의 가로수로 인기가 높다. 서울의 청계천로와 로데오거리에는 이팝나무거리가 있고, 이천시청 주차장에도 이팝나무가 가로수로 심겨있다. 시골 농부들은 활짝 핀 이팝나무를 보면서 고봉으로 담긴 흰쌀밥을 생각했는데, 도시 시민들은 활짝 핀 이팝나무 꽃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아마도 산더미처럼 쌓인 눈꽃빙수를 떠올릴 게다.
조팝나무와 이팝나무를 다시 생각해보자. 조는 아주 작고 쌀은 조금 크듯, 조팝나무는 개나리처럼 키가 작은 관목이고 이팝나무는 느티나무처럼 키가 큰 교목이다. 조팝나무 꽃은 청명과 곡우 절기인 4월에 피고, 이팝나무 꽃은 입하와 소만 절기인 5월에 핀다.
두 나무의 공통점은 꽃빛이 하얗고 이름에 밥이 들어있으며, 꽃 필 때를 벼농사에 참고할 수 있다. 조팝꽃이 한창일 때 볍씨를 뿌리고, 이팝꽃이 한창일 때 모내기를 한다. 다시 처음 물음을 돌이켜보자.
볍씨는 언제 뿌리고 모는 언제 심을까?
조팝나무 꽃 필 때 볍씨 뿌리고, 이팝나무 꽃 필 때 모 심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