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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뜨기 Aug 09. 2020

돌아오오 오리여

두 오리

초등학교 5학년 여름방학 때의 일이다. 당시 집에서는 봄에 사 온 오리를 뒤꼍에서 키우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먹이통과 물그릇을 만들어주었고 부쩍부쩍 자라는 그들을 보며 마냥 기꺼워하였다.


오리는 가축치곤 붙임성이 없다. 매일 먹이를 주는 나에게조차도 가까이 오지 않고 겉돌다가 내가 먹이통에서 비켜서면 그때서야 머리를 까딱거리며 슬몃슬몃 다가와 허천나게 먹어댄다. 한번은 이리저리 몰아서 겨우 붙잡아 품에 안았는데 살이 올라 제법 묵직했다. 백조처럼 날까 싶어 공중으로 던져 보았는데 요란하게 푸드덕거리더니 우스꽝스러운 꼴로 떨어지고 말았다. 내 한 가닥 기대와 함께.


그날도 또래들과 저수지에서 물놀이를 하고 집에 왔는데 따가운 뙤약볕 아래에서 헐떡거리는 오리를 보니 안쓰러운 느꺼움이 들었다. 오리가 물놀이를 얼마나 좋아하는 줄 알기에 이들에게도 물놀이를 시켜주려는 착한 마음으로 집 뒤의 물웅덩이로 데리고 갔다.


뒷마당 울타리 안에서만 놀다가 처음 밖에 나온 두 오리는 어리둥절하여 다시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난 기다란 대나무로 툭툭 치며 그들을 집 뒤의 둠벙으로 안내했다. 둠벙은 그들이 지내는 뒷마당보다 좁았으나 물이 채워진 곳이다. 처음엔 내 눈치를 보며 멈칫멈칫하더니 이내 무자맥질을 하며 신나게 물놀이를 했다. 두 오리가 물 위에서 노니는 것을 지켜본 후에 길 건너편 숲정이로 갔다.


그곳에서는 어머니가 담뱃잎을 새끼줄에 엮고 계셨다. 난 그 옆의 그늘 진 잔디 위에 팔베개를 하고 누웠다. 솜털구름이 떠있는 푸른 하늘이 너무 부시어 눈은 저절로 감겼다. 찌르레기의 지저귐과 매미의 맴맴 소리가 스르르 멀어졌다. 옆에선 어머니의 담뱃잎 엮으시는 소리가 사각거리고, 멀리에선 어떤 농부의 고함소리가 자그마하게 들리다가 사라진다. 시원한 산들바람이 간간이 얼굴을 스치고….


얼마나 지났을까?

무엇에 깜짝 놀란 양 벌떡 일어났다. 사위를 둘러보니 한낮 농촌의 풍경은 그지없이 평온했다. 한데 왠지 이상한 예감이 들어 둠벙으로 달려갔다.

아, 연못 위에 있어야 할 허여멀쑥한 오리들이 보이지가 않았다. 내가 너무 순진했다. 오리들이 둠벙 안에서만 놀 줄 알았다. 둠벙과 논은 나란히 자리하여 얼마든지 기웃거릴 수 있었다. 아이들더러 놀이터 벤치에만 가만히 앉아 있으라면 그럴 아이들이 아니듯, 오리는 자연스레 둠벙에서 놀다가 논으로 들어갔다. 순간 덜컥 겁이 났다. 난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짓가랑이를 걷어붙이고 맨발로 논에 들어갔다.


논바닥은 갯벌처럼 물컹하여 발이 푹푹 빠지고, 한발 한발 옮기기가 영화 속 느린동작 장면을 연기한 듯했다. 벼잎 끝은 송곳처럼 뾰쪽하여 허벅지가 따가웠고, 여름 한낮의 태양은 밤송이처럼 가시투성이라 뒤통수가 따끔했다. 내 머릿속엔 노기 띤 아버지의 얼굴로 가득 차서 따가움 따윈 아랑곳없이 목줄 풀린 염소처럼 논을 헤집었다. 


둠벙 아래에서 시작한 논은 저 멀리 저수지까지 조각그림판처럼 펼쳐져 있었다. 둠벙 바로 아래의 한 마지기 논을 살폈다. 없었다. 다시 그 아래의 서너 마지기 논을 샅샅이 톱았다. 없었다. 또다시 그 아래의 대여섯 마지기 논을 휘뚜루마뚜루 뒤졌지만 사라진 오리는 보이지 않았다.


오리는 움직일 때 꽥꽥 소리를 지르기에 논두렁에 서서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평소엔 시끄럽고 괴상하여 듣기 싫었던 그 소리를 그때는 얼마나 듣고 싶었는지 모른다. 멀리 계신 어머니는 내 속도 모르고 왜 남의 논을 뒤지냐며 나무라셨다.


거진 스무 마지기의 논을 뒤졌다. 벼는 키가 커서 작은 오리들은 보이지가 않았고, 들판은 풀벌레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한데 요란스러운 오리 울음소리는 들리지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사이에 그 느린 오리가 여기까지 왔을 리 없다고 한 곳까지 왔으나 끝내 달아난 오리를 찾을 수는 없었다. 미운 오리들, 내가 그들을 얼마나 잘 돌봐줬는데. 오늘은 특별히 물놀이까지 시켜줬는데 날 배반하고 도망치다니!


할 수 없이 오리무중(五里霧中)인 오리를 포기한 채 어머니 곁으로 갔다. 어머니는 별다른 화를 내지 않으셨으나 내심 서운하신 것 같았다. 아버지가 두렵기도 하고 오리에게 화나기도 하여 다소곳해진 나는 힘없이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등에 걸터앉은 석양은 물 먹은 솜이불처럼 묵직하여 내 발걸음은 길에 도장 찍듯 터벅터벅 힘겨웠다.


어스름이 깔리자 마당 한가운데 모깃불을 피웠다. 몽글몽글 피어오른 메케한 연기는 온 집안에 자욱하여 모기뿐만 아니라 사람도 잡게 생겼다. 평상 위에서 모기를 쫓으며 수박을 먹고 있는데 아버지께서 일을 마치시고 들어오셨다. 피곤하셔서 식사를 하신 후 바로 주무셨으므로 오리가 없어진 것을 모르셨다. 그러나 내일 아침이면….


가만히 집 뒤로 갔다. 온 세상을 뒤덮은 적막한 밤하늘, 새까만 천에 다이아몬드를 수놓은 듯 촘촘한 별무리, 소란한 듯 은은한 듯 풀벌레 합창소리 울리는 한여름밤. 내 머릿속은 온통 시름으로 가득했다. 별 보며 기도했다. 무슨 기도인지는 몰라도 하여튼 간절했다.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깜냥이었다.


울타리 밖의 오리들이 이 밤을 무사히 보내길 바라는 건 무리다. 동네에는 족제비나 들고양이가 많아서 작은 가축들이 잡아먹히곤 했다. 우리도 봄에 오리 새끼를 살 때는 네 마리였는데, 그중 두 마리는 족제비에게 잡아 먹히고 이 두 마리만 남았던 것이다. 결국 죽 쑤어 족제비 좋은 일이 될 판인가?


아침 햇살이 창호문을 넘어 방바닥에 길게 드러누울 때까지 자던 나는, 뒤꼍에서 들리는 귀 익은 소리에 벌떡 일어나 뒷문을 열어젖혔다. 놀랍게도 미운 오리 두 마리는 여느 때와 똑같이 뒤뚱거리며 뒤꼍을 거닐고 있었다.

부엌의 어머니께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보니, 새벽에 밥을 지으려고 나오니 오리들이 길쭉한 머리를 두리번거리며 의기양양하게 고샅에서 마당으로 들어오더라는 거였다.


내 맘 졸인 그들이 얄밉기도 했지만 살아서 돌아오니 놀랍고 반갑고 기뻤다. 보듬어주러 다가가니 날지도 못한 날갯짓 하며 저만치 달아났다. 나는 하늘 날듯이 기뻐서 뒤뜰을 날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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