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이
태풍이 지랄하던 광란의 지난 밤, 그리고 오리발 내밀듯 말짱한 이 아침.
어제는 당직근무라서 밤에 학교에 있었다. 후문 초소에서 근무하는 대원에게서 연락이 왔다. 가로수가 마구 흔들리는데 곧 쓰러질 것 같다는 것이다. 바람은 미친개처럼 여기저기를 헤집으며 불어대는데 차를 몰고 후문으로 갔다.
무기고를 돌아 막 후문 진입로에 접어드는데 4층 높이의 은사시나무가 쩍 하며 내 앞에서 고꾸라졌다. 길을 절반 가리고 드러누운 나무를 비켜서 더 나아가는데 다시 한아름의 플라타너스가 도로로 쓰러졌다. 이번에는 길을 완전히 가로막아 버렸다. 옆에 있는 나무들도 뿌리가 들썩거리며 내게 엎어질 기세다. 만일 내 뒤의 나무가 넘어지면 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될 판이다.
그 큰 나무들이 부썩거리며 떠는 것을 보니 가슴이 철렁했다. 바람의 힘, 눈앞에서 생생하게 접하니 등골을 타고 뻗치는 소름이 머리에 끼쳤다. 순찰을 포기하고 일단 당직실로 돌아갔다. 뭐가 그리 화났는지 폭풍은 학교 구석구석을 누비며 난리를 쳤다. 후문 근무자는 계속 보고했다. 겁에 질린 초병의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끊어질 듯 말 듯 들렸다.
“초소 앞의 나무가 쓰러졌습니다. 어…, 또 한 그루, 그 옆의 나무도 같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길이 완전히 막혀 버렸습니다.”
아침을 기다릴 수밖에, 이 밤중에 다시 그곳에 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아침, 얄밉도록 말짱한 아침이다. 태풍 <올가>의 피해사항을 살피기 위해 학교 곳곳을 둘러봤다. 체력단련장의 그물망이 찢겼고, 클럽하우스의 지붕 손실, 장비창고 출입문 훼손 그리고 나무들의 쓰러짐.
예년에도 태풍이 지나가면 간혹 나무가 쓰러지기도 했었다. 그러나 많아야 서너 그루였다. 그러나 오늘의 피해상황은 최악이다. 후문의 가로수 여덟 그루, 골프장 잣나무 쉰 그루, 산책로 가로수 마흔 그루, 대략 백여 그루의 나무가 고꾸라졌다.
어떻게 사태를 수습해야 할지 막막했다. 일어나자마자 30명의 대원들을 데리고 우선 후문 길에 쓰러진 나무들을 치웠다. 어제 잠을 거의 못 잤는데, 오늘 일찍 집에 가기는 글렀다.
아침 하늘은 고요했다. 마치 어젯밤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어쩜 저렇게 변할 수 있을까? 뒤 마려워 황급히 화장실을 들어갈 때와 시원스레 일 보고 나올 때의 표정처럼 너무나 다른 하늘빛에 내 낯빛이 당황스럽다. 폭풍 후에 고요 찾아오듯 아픔 후에 기쁨 찾아올까?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사람들은 왜 사랑 때문에 울어야 할까? 지혜라는 아이가 있다. 어젯밤에 그냥 전화를 했는데, 목이 잠겨 있었다. 자다 일어난 줄 알았는데 아니라고 한다. 어디 아프냐고 물어도 아니라고 한다. 지혜답지 않다며 너 혹시 무슨 일 있냐고 물으니,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오빠, 나 헤어졌어요!”
그리고 이내 흐느낀다.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대로 있었다.
“저 집에 혼자 있어요. 엄마는 수련회 갔고, 아빠도 나가셨고, 오빠는 섬활 갔어요.”
뭐라 말해야 하나! 미처 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렇다고 나 몰라라 하기엔 그 아이가 너무 가여웠다. 그 애의 글을 통해 그 애가 얼마나 그 남자를 좋아하는지 알고 있었다. 전혀 문제 없어 보였고, 지혜는 그로 인해 매우 행복해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신앙적인 부분에서 일치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 떠올라서 한 가지 얘기를 시작했다.
“지혜야, 내가 아는 한 아이가 있는데, 그 애는 어떤 남자를 매우 좋아했었지. 그런데 둘은 헤어졌어. 그래서 그 아이는 매우 힘들어 했어. 그 아이의 엄마는 그런 딸의 모습을 보며 마음이 무척이나 아팠단다. 왜냐면 엄마가 간섭했었거든. 힘들어하는 딸을 보며 엄마는 생각했데. 내가 괜히 딸의 인생을 힘들게 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야. 그러나 엄마의 맘속에 이런 노파심이 있었다. 딸의 진로는 딸이 결정하지만, 딱 한 가지는 어미로서 간섭하고 싶다는 거야. 바로 신앙적인 부분이었지. 그 아이의 남자친구는 신앙이 없었거든. 내 추측이지만 혹 너의 경우에도 이와 같지 않니?”
지혜는 말했다.
“맞아요. 엄마는 내게 이렇게 말했죠. 차라리 네가 장애인하고 결혼한다 해도 난 반대하지 않겠다. 그러나….”
그리고 계속 훌쩍거렸다. 난 말없이 기다렸다. 사람이 사람과 사귀면서 서로 기대하고 바라는 사항이 있다. 이는 저마다 다르다. 어떤 이는 외모를, 어떤 이는 학벌을, 어떤 이는 경제력을, 그리고 어떤 이는 신앙을 본다. 나름대로 가치의 기준이 다르지만 그 가치를 가진 이로서는 매우 중요한 사항이다.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는 신앙이 대수롭지 않겠지만, 신앙인에게는 인생관이기에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잠시 후 지혜가 말했다.
“난 이제 누구에게도 하나님을 전할 수 없을 거예요. 난 그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줬어요.”
난 물었다.
“누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니?”
“내가요.”
역시, 지혜가 그렇게 슬퍼하는 걸 보며 짐작했었다. 아이러니다. 먼저 헤어지자고 말하고서는 오히려 본인이 더 슬퍼서 괴로워한다.
“왜?”
난 안다. 지혜가 그 남자를 처음 만난 순간 눈에 콩깍지가 씌워 애오라지 그 남자만 바라봤던 것을. 근데 왜 먼저 헤어지자고 말했을까?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어요. 아니라는 걸 알면서 계속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힘들었어요. 인정하고 싶지 않았죠. 그러나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어 인정한 거예요. 그래서 헤어지자고 말했어요. 그이에게는 신앙이 없어요. 내가 그의 가슴에 하나님을 심으려고 했었죠. 그러나 그게 안 된다는 걸 알았어요.”
지혜가 그 남자에게 신앙을 갖게 하려고 얼마나 애쓴 지를 알고 있었다. 지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지쳤나 보다. 하긴 지칠 만도 하다. 아무리 힘센 나무꾼도 연거푼 도끼질이 힘이 들고 지친다. 지친 아이에게 뭐라도 말을 해줘야 할 것 같았다.
“지혜야, 누군가는 씨를 뿌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열매를 거두지. 씨 뿌리는 자가 열매를 거두기도 하지만 아닌 경우도 있어.”
지혜는 내 말을 부정했다.
“아녀요. 흑흑…, 그 이의 영혼은 어찌하라는 거죠. 내가 아니면 누가 하나님을 그 이 가슴에 심어주죠?”
“그건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른다. 그러나 난 느낀다. 네 진심과 사랑이 헛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비록 지금 당장은 회의적이더라도 말야.”
“오빠, 미안해요.”
그런 와중에도 남을 생각하다니! 난 힘들어하는 그 아이에게 별 도움을 줄 수 없어 오히려 미안했다. 그래서 노래를 불러 주었다.
내가 처음 만들었던 <친구에게>라는 노래를. 고등학교를 졸업하여 친구들과 헤어진 후 그 친구들을 그리워하며 만들었던 곡이다. 매우 친했지만 우리의 삶의 현실은 이별이라는 게 있어서 그리워한다는 것, 그래서 추억을 간직한다는 것. 이별은 분명 슬프다. 우리 삶에는 많은 이별이 있다. 그러나 만남보다는 적다.
사랑하는 친구야 너는 어디에
나는 오늘도 너를 그린다.
어둠이 내려앉고 적막이 흐르면
은하수 속에서 너를 그린다.
추억의 그 시절은 저 멀리 있고
너와 나 이렇게 각기 제 길로 향하네
친구야 난 오늘도 너를 그리며
옥상에 올라 노랠 부른다.
음~ 친. 구. 야.
내가 노래를 부르는 동안 수화기 너머 지혜의 흐느낌은 더해갔다. 모르겠다. 어떤 게 사랑인지, 사랑 때문에 왜 아파하는지!
“오빠, 잠을 못 자겠어요.”
나도 못 잤다. 태풍 때문에, 당직 때문에, 그리고….
태풍 후엔 고요가 있고, 비 온 후에 무지개가 있다. 무지개는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 우리의 삶에 있어 무지개는 무엇일까? 그 무지개를 고대한다.
“지혜야, 힘 내!”
이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을 수밖에 없었다. 곁에 있다면 꼭 안아주며 어깨라도 토닥거려주고 싶었다.
20세기 말, 경찰대학 근무할 때 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