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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

by 보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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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평생 가장 커다란 위기를 맞이하였다.


가발을 안 쓰고 나온 것이다.


여느 때처럼 일어나자마자 가발부터 썼어야 했다.

아침부터 속이 안 좋은 바람에 화장실에서 사투를 벌이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그래서 급하게 집을 나선 것이 화근이었다.


집사람이 뭐라 뭐라 소리를 쳤지만, 잔소리를 경청해 줄 여유는 없었기에 못 들은 척 뛰쳐나왔다. 지금 생각해 보니 집사람은 나의 머리통을 보고 기겁을 해서 가발을 챙기라고 했던 것 같다. 그런 거면 뭐라도 집어던져서 자빠뜨린 다음에 제대로 말해줄 것이지, 그렇게 가만히 서서 소리만 지르면 어떻게 안단 말인가.


하지만 이미 부질없는 일.


어쩐지 평소보다 머리통이 시원했다.

바람도 잘 통하고 상쾌했다.

지금 쓰고 있는 가발을 처음 맞출 때, 처음에는 답답하지만 점점 익숙해져서 가발을 쓰고 있는 줄도 모르게 될 거라는 가발가게 사장의 말이 생각났다. 나에게도 드디어 그때가 온 것이구나. 그래서 이렇게 안 쓴 것처럼 쾌적하고 상쾌한 것이었구나.

나는 그렇게 믿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낀 것은 구룡역을 지날 때였다.

내 앞에 서 있던 청년이 나를 보고 눈살을 찌푸리고는 자리를 옮겼다.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기분이 나빴다. 애비뻘 되는 사람한테 자리양보라도 바랬던 걸까? 왜 인상을 썼지? 나는 그 청년을 쏘아보고 천정으로 눈을 들었다. 그리고 천정에는 누가 거울로 장난이라도 하는 듯 하얀빛이 반사되어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곧 그 빛이 나의 움직임을 따라 이동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뭐지?

의아해하고 있는데 맞은편 자리에 앉아있던 사람이 일어나서 지하철에서 내렸다. 그리고 그때 나는 보았다. 맞은편 좌석 뒤 차창에 비친, 가발 없이 반짝이던 나의 머리를.


“으악!”


나는 나도 모르게 육성으로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향했고, 어쩔 줄을 몰라하던 나는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했다.


“아, 잘 못 탄 줄 알았네… 아 식겁했네…”


다행히 사람들은 다시 각자의 스마트폰에 집중할 뿐, 나에게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순간적인 위기는 모면했으나, 앞으로가 문제였다. 이를 어쩐단 말인가.

회사 사람들은 내 머리가 이렇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다.

얼마 전 박 차장은 내 가발을 보고 도대체 머리 관리를 어떻게 하시길래 이렇게 숫이 많냐고 부러워하기도 했다. 아침저녁으로 검은콩 두유를 마신다며 으스댔는데, 내 머리꼴이 이렇다는 걸 알면 나를 비웃을게 분명했다. 아부인지 시샘인지 동안이라고 떠들어대던 젊은 직원들의 얼굴을 생각하니 당장 지하철 문을 열고 선로로 뛰어내리고 싶었다.


갑자기 아프다고 거짓말을 하고 회사를 가지 말까?

연차를 마음대로 쓰는 젊은 직원들한테 주인의식을 갖고 휴가 좀 눈치껏 돌아가면서 쓰라고 꼰대짓을 한 게 바로 어제인데 아파서 결근했다는 말이 어떻게 들릴까?

이제 정년퇴임도 얼마 안 남았는데, 그냥 당겨서 그만둔다고 할까? 그러면 집사람한테 맞아 죽어서 이 세상을 퇴임하겠지? 지금까지 어떻게 버틴 회사인데 그건 말이 안 된다.

회사 가는 길에 근처 이발소에 들러서 차라리 삭발을 하고 갈까?

단호한 결심이 필요한 일이 있어서 그랬다고 하면 적당히 믿어주지 않을까?

하지만, 머리가 자라기 시작하면 금방 들키고 말 텐데,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나는 눈을 감고 지난날을 돌아보았다.


사실 그동안 가발을 쓴다고 얼마나 불편했던가.

그냥 내 머리는 원래 이렇다고 자신 있게 밝힐까?

지금이라도 떳떳하게 밝히면 잠시 놀림감을 되겠지만, 나의 용기에 모두 박수를 쳐주지 않을까?


한참을 고민했다.

그리고 고민의 끝에 다다르기 전에 지하철은 강남구청역에 도착했다.

나의 두 발은 습관적으로 회사로 나를 이끌었다.


회사 출입문 앞에서 잠시 멈추었다.

지난 60년의 세월 속에서 내가 남의 눈치 보지 않고 편하게 나로서 살아온 시간이 얼마나 될까?

이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그만 의식하고 나로서 살아도 될 때가 되지 않았을까?

나의 세월은… 그만한 자격이 있는 것 아닐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나를 본 모두가 당황할 것이다. 그리고 나를 피하기도 할 것이고 비웃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괜찮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나를 보고 인사를 하면서도 아무도 당황하지 않는다.

회사 창문에 비친 내 모습은 여전히 반짝이는데,

누구도 나를 비웃거나 당황해하지 않는다.


나는 얼떨떨해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박 차장이 다가와 인사를 했다.


“어? 오늘은 가발 안 쓰셨네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어? 어… 귀찮아서…”

“날 더워지면 좀 덥죠?”


박 차장은 나의 추천으로 마시던 검은콩 두유를 호로록 거리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모두… 알고 있었어?


갑자기 부끄럽기도 하면서도 그동안 모른척해준 모두가 고맙기도 했다.

나는 그동안 무엇을 그렇게 부끄럽게 애써온 걸까.

허탈함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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