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5분혁신.영화읽기]
[방구석5분혁신=안병민] 내 이름은 조각이다. 60년 넘게 살았다. 그중 40년, 사람의 숨을 끊는 일을 업으로 삼았다. ‘방역’이라 불리는 이 일은 내게 감정을 허락하지 않았다. 손끝에 묻은 피, 심장이 멎는 순간의 고요, 그 모든 게 내 삶의 전부였다.
하지만 요즘, 내 몸이 나를 배신한다. 손이 떨린다. 기억도 흐릿하다. 거울 속 얼굴은 낯설다. 주름진 피부는 내가 누구였는지 묻는다. 노화는 단순히 몸이 늙는 게 아니다. 내가 쌓아온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잔인한 질문이다. 나는 누구였나? 내가 믿어온 나는 아직 존재하는가?
조직은 나를 퇴물이라 부른다. 투우라는 젊은 킬러는 내 목에 칼을 겨누며 조롱한다. 그의 눈초리는 내 안의 균열을 드러낸다. 시간은 내게서 민첩함을 앗아갔다. 조직은 내게서 가치를 앗아갔다. 하지만 정말 두려운 건 그들이 아니다. 내 안에서 자라나는 공허다. 노화는 내게 시간을 헤아리게 한다. 내가 죽인 이들, 내가 외면한 감정, 내가 잃은 순간들. 시간은 그것들을 하나씩 소환하며 나를 심판한다. 나는 여전히 조각일까, 아니면 그저 시간 속에 흩어진 잔해일 뿐인가?
시작은 버려진 개 '무용'이었다. 그렇게 강선생을 만났다. 그의 손은 동물을 치료하듯 부드러웠다. 그의 딸은 세상에서 가장 맑은 웃음을 지었다. 그들과의 시간은 내가 잊고 지냈던 무언가를 떠올리게 했다. 따뜻한 밥 한 끼, 누군가와 나누는 평범한 대화, 그런 것들이 내게도 가능했던 삶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지켜야 할 건 만들지 말자.” 그게 내 신조였다. 애정은 약점이고, 연민은 짐이다. 그런데 왜 그들을 보면 가슴이 아팠을까? 그들의 웃음이 내 안의 무언가를 깨웠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을 바라보는 내가 역겨웠다. 사람을 죽이는, 피로 얼룩진 손으로 누군가를 지킬 자격이 내게 있을까? 내 안을 파고드는 질문. 마음 속에 피가 흘렀다.
투우는 내 과거의 그림자였다. 그의 눈에 타오르는 증오는 내가 죽인 이들의 얼굴이었다. 그는 나를 무너뜨리려 했다. 맞다, 그의 분노가 정당할지도 모른다. 내가 뿌린 업보가 그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와 마주할 때마다, 나는 내 안의 균열을 보았다. 내가 피해왔던 건 투우가 아니었다. 나 자신이었다. 내가 죽인 이들, 내가 억눌렀던 감정, 내가 외면했던 죄책감. 투우는 나를 거울처럼 비췄다. 그의 칼날은 내 목을 겨누었지만, 진짜 아픈 건 내 안에서 자라는 의문이었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살아온 이 삶은 무엇이었나?
그와의 마지막 대결은 단순히 생존을 위한 싸움이 아니었다. 칼을 쥔 손이 떨렸다. 숨이 거칠어졌다. 강선생과 그의 딸을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을 지키려는 마음이 내게는 낯설었다. 그 연민이 나를 약하게, 또 동시에 나를 강하게 만들었다. 투우의 눈을 보며, 나는 그의 증오를 이해했다. 하지만 용서할 수는 없었다. 아니, 어쩌면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는지 모른다. 칼이 그의 몸을 뚫었다. 나는 승리한 게 아니었다. 그저 살아남았을 뿐.
"내가 지독한 짓을 한 거 알아. 또 다시 나를 두고 가버린단 말에 너무너무 화가 났었거든. 근데 분명 살아남는 사람은 당신일 거야.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으니까." -투우-
이제 나는 안다. 나는 깨끗하지 않다. 내 손은 피로 얼룩졌다. 내 마음은 상처로 가득하다. 강선생과 그의 딸은 내게 잠깐의 따뜻함을 주었지만, 그들을 지킨다고 내가 구원받는 건 아니다. 나는 여전히 조각이다. 킬러이자, 인간이자, 끝내 답을 찾지 못한 질문 그 자체다. 내 삶은 결말 없이 이어진다. 그게 나의 업보인지, 아니면 자유인지, 나는 아직 모른다. 내가 누구였는지, 무엇을 남길 수 있는지. ⓒ혁신가이드안병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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