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5분혁신.영화읽기]
[방구석5분혁신=안병민] 1932년 미시시피 클락스데일. 나는 새미. 목사의 아들이고, 블루스를 연주하는 '죄인'이다. 목사 아들인 내게 사람들이 붙인 별명은 '프리처 보이'. 하지만 내가 진짜 원한 곳은 강론대가 아니라, 불 꺼진 주점, 클럽 주크의 무대 위였어.
그날 밤, “I Lied to You”라는 노래를 부를 때, 과거와 미래가 동시에 열렸어. "음악은 산 자와 죽은 자를 모두 사로잡는다." 내 블루스는 우리의 역사를 잇는 다리였어. 그리고 함께 깨어난 또 다른 존재들, 렘믹이 이끄는 뱀파이어 무리. 내 음악이 그들까지 불러낸 거였지.
그들은 말할 때 늘 "우리"라고 했어. "나"가 아니라. 생각을 공유하고 감각을 공유하는 집단. 피를 나누면 기억도 나누는 존재들. 불멸을 구원이라 말하며, 우리에게 영원한 가족이 되자고 속삭였지. 더는 외롭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나는 느꼈어. 그 ‘완전함’이란, 개별성이 지워진 획일적인 정적이란 걸. 영원히 하나인 존재들이라는 건, 결국 누구도 ‘나’일 수 없다는 뜻이었어.
클럽 주크에 모인 우리 모두는 '죄인들'이었지. 각자의 고통, 사연, 실수, 사랑을 끌어안고 불완전하게 살아가는, 유한한 존재. 슬픔은 다르고, 리듬도 다르고, 춤도 달랐어. 하지만 그 불협화음이 밤을 가득 채웠고, 그 어지러운 불꽃 속에 삶의 온기가 있었지. 하나가 아니어도 좋았어. 자유는, 각자의 방식으로 노래할 수 있는 데서 시작되니까.
렘믹은 아일랜드인. 침략당한 역사와 식민의 상처를 말하던 자. 자신도 고통을 겪었기에 우리를 이해한다고 생각했던 걸까. 하지만 그가 내민 건, 인간성을 잃는 대가로 얻는 평등이었다. 블루스가 말하는 자유는 그런 게 아니었어. 우리는 싸우고, 다투고, 때론 사랑에 실패하지만, 그 모든 것을 스스로 선택해. 신이 아니라 운명이 아니라, 내 노래, 내 박자, 내 삶으로.
기독교와 블루스, 그 사이에 난 서 있었어. 목사 아버지는 내게 죄를 버리고 구원을 택하라 했지. 하지만 내게 블루스는 죄가 아니었어. 그건 고백이고, 기도였고, 살아있다는 증거였어. 교회가 내게 시든 구원을 약속할 때, 클럽 주크는 나에게 불완전한 사랑과 뜨거운 실패를 허락했지.
레믹은 내 머리를 강물에 박으며 말했다. “신의 축복을 주겠다. 이제 넌 우리다.” 그 순간 난 기타를 쥐었지. 내 음악은 날 하나의 무리 속에 복속시키는 게 아니라, 나 자신으로 서게 해줬거든. 내가 그에게 맞선 건 신앙 때문이 아니었어. 나를 나로 지켜낸 건 기타였고, 내 안에 있는 목소리였지. 그와 싸웠던 이유? 그가 단지 악마여서가 아니라, 나를 침묵시키려 한 존재였기 때문이야.
죽지 않는 불멸의 삶과 죽어야 할 유한한 삶. 집단의 의식과 개별의 혼. ‘우리는 하나’라는 유혹과 ‘나는 나’라는 외침. 그 충돌이 이 밤을 만들었고, 우린 그 사이에서 살아남거나, 혹은 사라졌어.
나는 결국 교회 문 밖으로 나왔고, 내 길을 택했어. 죄인의 길이라고? 그래, 맞아. 나는 죄인이다. 하지만 내 노래는 내가 선택한 죄였고, 그 죄는 자유였어. 그날 이후, 난 안다. 영원보다 중요한 게 있다는 걸. 고통받고 실수하고 결국 죽는다 해도, 내가 내 삶을 연주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는 걸. 죄인이라 불려도 좋아. 왜냐하면, 나는 내 식으로 노래했고, 내 식으로 사랑했고, 내 식으로 끝까지 버텼으니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 밤이 내 삶의 시작이었어. 가장 잔인했고, 동시에 가장 뜨거웠던 밤. 내가 나로 살아남기 위해 싸웠던 유일한 밤.
나는 새미. 영생이란 유혹을 뿌리치고, 내 노래를 끝까지 부른 남자. 그날로부터 40년이 지난 오늘도 이 부서진 기타를 손에 쥔다. 누군가는 또 “우리가 되자”고 말하겠지. 그때마다 난, 내 블루스로 대답할 거야. “나는, 나야.” ⓒ혁신가이드안병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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