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5분혁신.드라마읽기]
[방구석5분혁신=안병민] 1980년대. 서슬 퍼런 군홧발이 문화의 숨통을 조인다. 질식할 것 같은 공기 아래서 기형적인 욕망들이 음습한 극장가를 떠돌던 시대. 당대 최고의 문제작이자 신드롬이었던 영화 '애마부인'은 바로 그 시대가 낳은, 가장 뜨겁고도 모순적인 괴물이었다. 넷플릭스 시리즈 '애마'는 이 영화의 탄생기를 추적한다. 하지만, 드라마는 과거를 박제하는 길을 택하지 않는다. 대신 그 신화의 심장을 향해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댄다. 단순한 리메이크나 오마주가 아니다. 시대의 욕망이 어떻게 한 여성의 몸을 스크린 위에 재단하고 전시했는지에 대한 병리학적 보고서다. 그 폭력적인 시선에 맞서 자신의 언어를 되찾으려 했던 두 여성의 투쟁 기록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애마'는 시선의 권력, 몸의 정치학, 그리고 상징의 전복이라는 세 개의 축을 중심으로 80년대 충무로라는 전장을 맹렬하게 돌파한다. 그리고 그 끝에서, 남성들의 판타지였던 백마를 훔쳐 타고 광화문 대로를 질주하며, 이것이 과거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지금 우리의 이야기임을 선언한다.
1. 누가, 어떻게, 왜 보는가: '시선'이라는 이름의 감옥
'애마'의 세계는 온통 '보는 행위'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그 시선은 결코 순수하지 않다. 그것은 권력이자, 통제다. 때로는 그 자체로 폭력이다. 드라마는 이 다층적인 시선의 그물을 촘촘하게 직조해 보여준다.
첫 번째는 제작자 구중호(진선규 역)로 대표되는 '자본의 시선'이다. 그의 시선 아래, 톱스타 정희란의 몸은 예술의 재료가 아닌 팔아야 할 '상품'이다. 그는 배우의 예술적 고뇌를 '쓸데없는 자존심'으로 치부한다. '벗지 않겠다'는 선언을 통제 불가능한 '불량품'의 저항으로 간주한다. 그가 신인 신주애를 발탁한 이유 역시 그녀의 재능 때문이 아니다. 자신의 욕망대로 재단하고 통제하기 쉬운 '새 상품'이 필요해서다. 그의 사무실은 여배우의 몸을 규격화하고 값을 매기는 거대한 파놉티콘의 중앙 감시탑이다.
두 번째는 '국가의 시선'이다. 단지 저속하다는 이유로 모든 것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검열관의 시선은 무지하고 폭력적이다. 그들은 예술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단지 자신들의 규율에 맞춰 길들이려 할 뿐. 이 시선 아래서 에로티시즘은 그 자체로 불온한 것이 된다. 여성의 욕망은 통제되어야 할 사회악으로 낙인찍힌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둘러싼 가장 모순적이고 게걸스러운 시선, 바로 '대중의 시선'이 있다. 대중은 스타를 숭배하며 신화로 만든다. 동시에 그 신화의 제단 아래서 가장 잔인한 소비자가 된다. 그들은 스크린 속 희란의 화려함에 열광하고 그녀의 이미지를 소비한다. 동시에 스크린 밖 그녀의 사생활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가십으로 탐식한다. 신주애를 향한 악의적인 루머 기사는 바로 이 대중의 관음증적 욕망을 먹고 자란다. 대중의 시선은 애정과 증오, 동경과 질투라는 양날의 칼을 품고 있다. 그들은 배우가 스크린 안에서 보여주는 에로티시즘을 은밀히 즐기면서도, 스크린 밖에서는 그녀에게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이중성을 보인다. 이 시선은 보이지 않기에 더 강력한 감옥이다. 스타는 이 변덕스러운 시선의 파도 위에서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해야만 하는 존재로 전락한다.
하지만 '애마'에서 가장 극적인 변혁을 맞이하는 것은, 이 모든 외부의 시선이 아닌 내부를 향하는 시선일 것이다. 처음 희란이 주애를 보는 시선은 질투와 경멸로 가득 차 있다. 자신의 자리를 빼앗은 경쟁자, 스타가 되기 위해 '벗음'을 쉽게 선택한 여자. 하지만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이 시선은 점차 변모한다. 희란은 주애가 단순히 욕망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저항하고 있음을 목격한다. 남성 중심적인 촬영 현장에서 성적 대상화와 착취에 노출되는 주애의 모습을 보며, 희란의 시선은 경멸에서 연민으로, 그리고 마침내 연대의 시선으로 바뀐다. 그들은 비로소 자신들의 진짜 적은 서로가 아니라, 그들을 끊임없이 대상화하고 갈라놓는 거대한 시스템의 시선임을 깨닫는다. '애마'가 기존의 여성 서사와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단순한 피해자 서사에 머무는 대신, 감시의 시선을 상호 이해의 시선으로 전환하며 감옥을 탈출할 열쇠를 스스로 찾아낸다.
2. 굳건한 왕좌의 저항: 정희란, 이하늬의 이름으로
이 숨 막히는 시선의 감옥을 깨부수는 첫 번째 균열은 정희란의 저항에서 시작된다. 그녀의 "더 이상 벗지 않겠다"는 선언은 단순한 연기 변신이나 이미지 관리 차원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시선에 의해 규정되고 소비되던 '대상으로서의 몸'을 거부하고,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고 통제하는 '주체로서의 몸'을 되찾겠다는 주권 선언이다.
이 첨예한 선언에 배우 이하늬는 자신의 모든 관록과 깊이를 쏟아붓는다. 그녀는 톱스타의 화려함과 그 이면의 공허함, 짓밟힌 자존심에 대한 분노와 그럼에도 잃지 않으려는 존엄을 다채로운 눈빛과 입술의 선으로 완벽하게 그려낸다. 특히 주애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이 경멸에서 연민으로, 그리고 동지애로 변해가는 과정의 섬세한 결은, 이하늬라는 배우가 가진 넓고 깊은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그녀는 정희란이라는 인물에 시대의 무게와 저항의 정당성을 부여하며, 왜 그녀가 흔들림 없는 정점의 배우인지를 스스로 증명한다.
3. 혜성의 도발: 신주애, 방효린의 발견
정희란이 정면 돌파를 택했다면, 신주애는 시스템의 논리를 역이용하여 내부에서부터 균열을 만들어내는 방식을 택한다. 그녀의 "벗겠다"는 선택은 순응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생존을 위한 치열한 '전략'이 숨어있다. 그녀는 검열을 피하면서도 에로틱한 긴장감을 만들어낼 수 있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하며, 수동적인 피사체에서 능동적인 창작의 파트너로 거듭난다. 그녀는 '보여지는 몸'의 한계를 인정하되, 그 안에서 최대한의 자율성을 확보하고 자신만의 의미를 생산해낸다. '벗겠다'는 그녀의 선택이 굴복이 아닌 전략임을 온몸으로 증명한다.
신주애 역을 맡은 배우 방효린은, 무엇보다도 신선하다. 단단한 존재감의 이하늬 앞에서도 밀리지 않는다. 그녀가 연기하는 신주애는 나이트클럽 댄서의 생존 본능과 스타를 꿈꾸는 야망, 그리고 누구도 예상치 못한 예술가적 총명함을 동시에 품고 있는, 매혹적인 캐릭터다. 방효린은 갓 피어난 꽃의 연약함과 야생의 들풀 같은 강인함을 한 얼굴에 담아내며 스크린을 장악한다. 맞다, 이하늬가 왕좌의 품격을 보여준다면, 방효린은 우리가 왜 새로운 별의 탄생에 박수를 보내는지를 깨닫게 한다. 그녀의 다음 작품이, 그녀가 앞으로 보여줄 미지의 얼굴들이 벌써 기대되는 이유다.
4. 질주하는 두 여성, '신화'의 고삐를 움켜쥐다
'애마'는 이 두 가지 상반된 선택에 우열을 두지 않는다. 대신 두 여성이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의 '몸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벌이는 고독한 싸움을 모두 존중하며 비춘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연대했을 때, 그들의 몸은 더 이상 평가받고 전시되는 대상이 아니라, 억압적인 현실을 뚫고 나아가는 강력한 연대의 '무기'가 된다.
이 모든 서사는 대종상 시상식에서 벌어지는 마지막 시퀀스를 향해 힘차게 달려간다. 희란의 폭로와 위기, 그리고 그 순간 백마를 타고 나타나 그녀를 구출하는 주애. 이 장면은 단순히 극적인 구출극을 넘어선다. '애마부인'이라는 기존의 신화를 완전히 전복하고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는 강렬한 퍼포먼스다.
원작 '애마부인'에서 말(馬)은 남성적 판타지 속에서 길들여져야 할 자연, 혹은 여성의 억눌린 성적 욕망을 대리하는 상징이었다. 남성 주인공은 말을 능숙하게 다룸으로써 여성에 대한 지배력을 확인받았다. 그러나 '애마'의 마지막 장면에서 말은 더 이상 남성의 소유물이 아니다. 희란과 주애, 두 여성이 함께 그 고삐를 움켜쥔다. 그들은 말 위에 올라타는 행위를 통해 남성적 욕망의 상징이었던 '애마'를 여성 해방과 연대의 상징으로 완벽하게 치환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이 질주하는 공간이다. 그들은 충무로라는 닫힌 영화계, 시상식장이라는 박제된 권위의 공간을 탈출하여 '광화문'이라는 대한민국의 가장 공적이고 정치적인 공간의 한복판으로 나아간다. 이것은 그들의 투쟁이 더 이상 개인적인 차원이나 영화계 내부의 문제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 전체를 향한 공개적인 외침으로 확장됨을 의미한다. 그들의 질주는 단순한 도피가 아니다. 새로운 시대를 향한 선전포고이자 출정식이다.
'애마'는 1980년대의 먼지 쌓인 필름을 복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2025년의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미투' 운동을 거치고, 디지털 성범죄가 일상이 된 지금, 여성을 대상화하는 시선의 권력은 과연 해체되었는가. 자본의 논리 앞에 몸의 주권은 안녕한가. '애마'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주는 대신, 40년 전 스크린을 찢고 나온 두 여성의 힘찬 말발굽 소리를 들려준다. 그 질주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말발굽 소리는 40년의 시간을 넘어, 지금 우리의 심장을 향해 울리고 있다.
사족. 아, 혹시 궁금해하실 분들이 계실까 싶어 덧붙인다. 뜨겁고 노골적인 성애 장면을 기대하신다면, 이 영화는 결코 아니다. 하나 더. 이 참에 '애마부인' 관람도 추천한다. 생각지 못한 쏠쏠한 재미가 있다. ⓒ혁신가이드안병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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