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5분혁신.영화읽기]
[방구석5분혁신=안병민] 모든 비극은 하나의 사건 파일에서 시작된다. 피고인은 '아버지'라는 이름의 침묵, 증인은 '딸'이라는 이름의 상처다. 여기, 유년 시절의 폭력이라는 같은 사건을 겪고도 전혀 다른 괴물이 되어버린 세 명의 증인이 있다. 한 명은 죄책감으로, 한 명은 거짓된 용서로, 나머지 한 명은 자기 파괴로 각자의 증언대에 오른다. 서로 다른 고통을 외치는 세 개의 목소리. 그들의 증언은 진실을 비추는 거울인 동시에 서로를 겨누는 칼날이 되어, 가족이라는 내밀한 지옥도를 완성한다. 영화 <세 자매>의 살갗 아래 숨겨진 그들의 처절한 증언을 공개한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이 사건 현장에서 판결을 내려야 할 배심원. 바로 당신이다.
1. 첫 번째 증언: 죄송해요, 제가 거기에 있어서 - 희숙
"내가 미안하다." 그 말은 내 숨이고, 존재 이유이며, 세상의 모든 공격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막이었다. 나는 내가 이복언니라는 사실, 이름에 돌림자가 없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존재 자체가 죄임을 일찍이 깨달았다. 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나와 진섭이를 때렸다. 엄마가 다른 자식이라는 이유로, 우리는 그의 가장 손쉬운 분노의 쓰레기통이었다.
사람들은 내 꽃집이 아름답다고 하지만, 나는 그곳에서 나를 벌한다. 날카로운 장미 가시로 팔뚝을 그으며 통증을 확인할 때, 나는 역설적으로 살아있음을 느낀다. 피를 보는 것에 익숙해진 삶. 고요하면 오히려 불안해지는, 학대 중독. 남편은 떠났고, 딸 보미는 나를 경멸하지만 나는 그저 "미안하다"고 말할 뿐. 최근에는 암 진단까지 받았다. 그래도 괜찮다. 아니, 괜찮아야만 한다.
그날, 아버지의 생일. 그 집의 공기는 수십 년 전과 같았다. 미연이는 믿음으로 무장했고, 미옥이는 분노로 폭발했다. 나는 그저 투명해지는 법을 택했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을 것이다. 가장 조용한 자가 가장 많은 것을 기억한다는 것을. 모든 비명과 모든 침묵과, 벽에 부딪혔던 살의 무게를.
내 딸 보미가 나 대신 소리쳐주었을 때, "우리 엄마 암이라고! 어른들은 왜 사과를 못해!"라고 외쳤을 때, 나는 처음으로 내 상처를 똑바로 봤다. 그래도 아버지는 사과하지 않았다. 그저 유리창에 머리를 박아 피를 흘릴 뿐. 익숙한 광경이었다. 결국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두 번째 증언: 나는 용서했다는 거짓말 속에서 - 미연
나는 아버지를 용서했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고, 나의 믿음이며, 내가 세운 왕국의 주춧돌이다. 나는 폭력의 직접적인 피해자는 아니었지만, 그 모든 것을 지켜본 목격자였다. 언니와 동생이 맞을 때, 미옥의 손을 잡고 맨발로 밤거리를 뛰쳐나갔던 그날의 공포를 나는 하루도 잊은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기도했다. 그 끔찍한 기억을 '용서'라는 이름의 상자 안에 가두고, 신앙이라는 자물쇠로 잠갔다.
그렇게 나는 나의 질서를 만들었다. 완벽한 가정, 존경받는 남편, 순종하는 아이들. 그러나 내 왕국에 균열이 생길 때마다 상자 속 괴물이 울부짖었다. 남편이 성가대원과 바람이 났을 때, 나는 조용히 그 여자의 눈에 주먹을 날렸다. 용서하지 못하는 내 안의 분노가 터져 나온 것이다. 식사 기도를 거부하는 딸을 다그치는 건 학대가 아니라 훈육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버지가 내게 가르친 유일한 언어, 바로 폭력이었다. 증오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를 가장 많이 닮아있다.
그날, 아버지 앞에서 내 평생의 거짓말이 발각되었다. 미옥이가 내 남편의 외도를 폭로했을 때, 동생 진섭이 아버지에게 오줌을 갈겼을 때, 내 신앙의 자물쇠는 박살 났다. 억눌렀던 모든 것이 터져 나왔다. 나는 아버지를 향해 절규했다. "목사님 말고요. 우리한테 사과하세요!!!!"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나는 아버지를 용서한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나의 용서는 상처를 외면하기 위한 가장 정교한 자기기만이었을 뿐이다.
세 번째 증언: 차라리 다 같이 죽어버리자, 어때? - 미옥
"나는 쓰레기야." 이 말은 내가 세상에 던지는 가장 큰 거짓말이자, 가장 처절한 진실이다. 나는 괜찮지 않다. 단 한 순간도 괜찮았던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술을 마시고, 소리를 지르고, 금발로 염색한 채 나이 많은 이혼남과 결혼한다. 내 고통의 부피를 세상이 알아챌 때까지 최대한 크게 부풀리는 것이다. 이거 보라고. 내가 이렇게 망가지고 있다고. 제발 누가 좀 나 좀 어떻게 해보라고.
언니들은 나를 이해 못 한다. 희숙 언니는 고통을 화분 속에 심어두고, 미연 언니는 기도문 뒤에 숨겨뒀다. 멍청한 언니들. 상처는 그런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다. 곪았으면 터뜨려야지. 나는 그날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언니 손에 이끌려 슈퍼까지 맨발로 뛰었던 기억뿐. 그게 왜였냐고 물어도 언니는 제대로 답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더 미친년처럼 날뛴다. 내 안의 비어버린 기억을 이 소란으로 채우려는 듯이.
아버지 생일? 웃기지도 않는다. 그 인간은 가해자고, 우리는 피해자다. 동생 진섭이가 아버지 얼굴에 오줌을 갈겼을 때, 나는 속으로 환호했다. 드디어 재판이 시작된 것이다. 나는 그 재판의 검사가 되기로 했다. 미연 언니의 위선, 형부의 외도 사실을 모두 까발렸다. 내 모든 망가짐을 증거물로 제출하며, 이 지옥의 실체를 온 세상에 드러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터뜨렸다. 수십 년 묵힌 고름을. 하지만 돌아온 것은 침묵이었다. 가해자는 말이 없었고, 다른 피해자들은 서로를 비난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아, 우리는 영원히 혼자겠구나. 나의 이 지긋지긋한 외침은 결국 아무에게도 닿지 않는구나.
사건 기록: 세 개의 비명, 하나의 진실
위의 세 독백은 영화 '세 자매'가 관객의 내면에 일으키는 파열의 기록이다. 이 영화는 단순히 불행한 가족사를 나열하는 대신, 트라우마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개인을 어떻게 조각내고 재구성하는지를 현미경처럼 들여다본다. 특히 신앙의 이름으로 아버지를 '용서했다'고 믿어온 미연의 자기기만이 무너지는 과정은 이 영화의 백미다. 그녀의 위선은 단순한 악의가 아니라, 끔찍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기 위한 처절한 생존 전략이었음을 보여주며 관객을 더 깊은 딜레마에 빠뜨린다.
이 영화의 성취는 배우들에게 있다. 김선영, 문소리, 장윤주는 연기하지 않는다. 각자의 방식으로 트라우마를 체화하고, 스크린 위에서 그 고통을 살아낸다. 김선영은 죄책감의 무게를, 문소리는 거짓된 용서라는 갑옷의 서늘함을, 장윤주는 깨진 유리 조각 같은 위태로움을 온몸으로 발산한다. 이들의 연기는 합주가 아니다. 불협화음이다. 그 불협화음이 '가족'이라는 이름의 지옥을 가장 사실적으로 증명하는 완벽한 앙상블이다.
남동생 진섭이 아버지에게 소변을 누는 행위로 촉발된 클라이맥스는 명장면이다. 억압된 모든 것의 폭발이자, 기괴하고 처절한 카타르시스다. "우리에게 사과하세요!"라는 미연의 절규는 이 가족, 나아가 폭력의 역사를 가진 모든 관계의 핵심을 꿰뚫는다. 가해자인 아버지는 끝내 사과 대신 유리창에 머리를 박는 자해를 택하며 책임을 회피한다. 진정한 사과의 부재. 이것이 영화가 말하는 비극의 영원성이다.
<세 자매>는 '불행 포르노'가 아니다. 이것은 '불행의 해부학'이다. 영화는 치유나 화해라는 손쉬운 탈출구를 제시하지 않는다. 봉합되지 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직시하게 만든다. 결말의 해변 장면은 모든 문제가 해결된 해피엔딩이 아니라, 이제야 비로소 서로의 지옥을 마주 본 세 자매의 불안정한 연대의 시작을 암시한다. 이 세 자매의 독백을, 이 처절한 증언을 들은 목격자로서 우리는 질문 받는다. 이 상처의 역사는 과연 여기서 끝날 수 있는가. 영화는 끝났지만, 재판은 이제 시작이다. ⓒ혁신가이드안병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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