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5분혁신.영화 읽기]
[방구석5분혁신=안병민] 이미 익숙한 세상의 법은 잊자. 이 판에는 국경도, 법전도 없다. 오직 금화와 피, 그리고 철저한 규칙만이 존재할 뿐. 이 어두운 게임의 플레이어들은 생존을 위해 움직인다. 신의 한 수가 될 수도, 최악의 패착이 될 수도 있는 그들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1. 그림자 왕좌, 최고회의 (The High Table)
이 세계의 신은 최고회의다. 국가도 군대도 아닌, 그 모든 것 위에 군림하는 보이지 않는 '질서'. 열두 가문이라는 이야기만 떠돌 뿐, 실체는 안개와 같다. 그들은 이 세계를 돌리는 거대한 운영체제(OS)다. 존 윅의 분노? 개인의 사정? 그들에게는 시스템 안정을 위협하는 '버그'일 뿐이다.
그라몽 후작, 심판관. 그들은 최고회의가 보낸 '백신 프로그램'이다. 버그를 수정하고 시스템을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해 파견된 대리인. 최고회의의 진짜 힘은 총이나 군대가 아니다. 이 판의 모든 플레이어들이 그 규칙이 절대적이라 '믿는다'는 사실, 그 믿음 자체가 그들의 권력이다.
2. 회색의 성채, 호텔 컨티넨탈 (The Continental)
최고회의가 하늘이라면, 컨티넨탈은 그 아래의 땅이다. 최고회의에 충성을 바치는 제후국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독자적인 군대와 법을 지닌 현실의 왕국. 특히 뉴욕 컨티넨탈의 지배인 윈스턴은 이 판에서 가장 노련한 체스 마스터다. 그는 몇 수 앞을 내다본다. 존 윅을 '내 아들'이라 부르는 그 애정 속에는, 군주의 계산이 뒤섞여 있다. 그가 최고회의의 눈앞에서 존을 쏘아 떨어뜨린 것은 배신이 아니다. 판 전체를 읽고 던진 최고의 승부수였다. 적에게 '죽음'을 보여줌으로써, 그에게 진짜 '살아남을' 시간을 벌어준 가장 차갑고도 뜨거운 구원이었다. 윈스턴에게 존 윅은 아끼는 아들이자, 자신의 왕국을 지키고 최고회의를 흔들 유일한 변수. 애증과 신뢰가 뒤엉킨 가장 복잡한 관계다.
3. 도시의 혈관, 바워리 (The Bowery)
컨티넨탈이 빛나는 성채라면, 바워리는 아스팔트 아래 흐르는 은밀한 혈관이다. 노숙자의 눈, 비둘기의 날갯짓이 그들의 정보망이 되어 도시 전체를 엮는다. 바워리 킹은 패배를 자양분 삼아 왕이 된 남자다. 과거 존 윅에게 베인 상처는 그의 목에 남은 흉터이자, 결코 방심하지 않겠다는 왕관이 되었다.
처음 그들의 관계는 우정이 아니었다. 7발짜리 총 한 자루를 건네며 대가를 논하는, 생존을 위한 '거래'에 가까웠다. 하지만 최고회의에 의해 모든 것을 잃고 내동댕이쳐진 순간, 그들의 관계는 변했다. 생존을 위한 계산은, 시스템을 향한 지독한 분노로 바뀌었다. 동정이나 감상이 아니다. 왕좌에서 쫓겨난 두 남자가 나누는, 피 냄새 섞인 거친 유대감이다. 시간이 갈수록 거래는 신뢰로 변해갔다. 그는 망가진 존을 거두고, 새 정장과 최고의 무기를 쥐여주며, 이 불가능한 전쟁의 유일한 '검'으로 그를 다시 세웠다. 그의 왕국은 화려하진 않지만,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의 비밀을 꿰뚫는다.
4. 지워지지 않는 문신, 루스카 로마 (Ruska Roma)
존 윅은 어디에서 만들어졌는가. 바로 이곳, 루스카 로마. 발레의 우아함 뒤에 뼈 부러지는 소리를 감춘, 피와 전통으로 묶인 집단. 그들은 존 윅의 '고향'이자 몸에 새겨진 '지워지지 않는 문신'이다. 그가 어떤 이름으로 불려도, 그의 근본은 이곳에 묶여 있다.
그들이 '티켓'이라는 묵주 맹세 때문에 존을 돕는 것은, 가족애가 아닌 외면할 수 없는 '책임' 때문이다. 존 윅은 그들이 빚어낸 가장 위대한 걸작이자, 조직을 위험에 빠뜨릴 가장 아픈 흉터다. 그들은 스스로를 예술가라 칭한다. 그들의 캔버스는 인간의 몸이었고 물감은 피였다.
5. 태풍의 눈, 존 윅과 그 주변의 인물들
이 거대한 판도를 뒤흔드는 중심에는 언제나 존 윅이 있다. 그는 왕도, 기사도 아니다. 그는 이 정교한 체스판을 통째로 엎어버리는 '태풍의 눈'. 왕좌를 탐하지도, 영토를 원하지도 않는다. 그는 오직 죽은 아내, 헬렌의 기억이라는, 이 세계의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단 하나의 성역을 지키기 위해 움직인다. 그의 슬픔은 총구가 되고, 그리움은 방아쇠가 된다. 그는 단순히 복수에 집착하는 남자가 아니다. 사랑의 기억을 지키기 위해 세상과 전쟁하는, 살아있는 유령이다. 그의 존재 자체가 이 세계의 모든 규칙과 질서에 던지는 근원적인 질문이다. 모든 오만한 자들에게 반드시 찾아오는 살아있는 '결과(Consequences)'다.
그의 주변에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의 비극을 비추는 '거울'들이 존재한다. 마커스는 사라져가는 구시대의 '의리'를 상징하는 거울이었다. 규칙보다 우정을, 시스템보다 사람을 중시했던 옛 시절의 마지막 기사. 그는 존의 목숨이 아니라, 그의 영혼을 구원하려다 쓰러져 갔다. 그의 죽음은 이 세계에서 낭만적 충성이 어떻게 파멸하는지를 보여주는 비극적 증거다.
카시안은 가장 완벽한 '프로페셔널'의 거울이다. 그는 존 윅과 똑같은 언어로 숨 쉬고, 똑같은 방식으로 사고하는 쌍둥이 같은 존재. 그의 슬픔과 분노는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그는 끝까지 규칙과 임무라는 선을 넘지 않으려 발버둥 친다. 그의 존재는 이 세계의 장인들이 어떻게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며 임무와 자신 사이에서 갈가리 찢어지는지를 보여주는 처절한 자화상이다.
그리고 케인. 그는 존 윅의 가장 어두운 '그림자'이자, '만약'이라는 가정의 거울이다. 만약 존 윅이 죽은 아내의 기억이 아닌, 살아있는 딸을 지켜야 했다면 어떤 모습이 되었을까. 그 대답이 바로 케인이다. 그는 딸을 위해 자신의 눈과 자유를 기꺼이 바쳤다. 그들의 결투는 단순한 싸움이 아니었다. 죽은 자를 위한 명예와, 산 자를 위한 생존이라는 두 가지 신념이 총구 끝에서 격돌한 철학적 논쟁이었다.
그라몽 후작은 그들과 다르다. 그는 최고회의 그 자체의 오만함이 육신을 입은 존재다. 존이 잃어버린 사랑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싸울 때, 그라몽은 시스템의 권위라는 추상적이고 거대한 명분을 위해 싸운다. 그는 규칙을 존중하는 척하지만, 실은 규칙이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고 믿는, 위험한 자다. 그는 존 윅을 죽이려 한 것이 아니다. 그는 '존 윅'이라는 저항의 상징, 전설 그 자체를 지워버리고 싶어 했다. 결국 그는 자신이 그토록 신봉하던 규칙의 허점을 보지 못하고, 전설을 죽였다는 명예를 탐하다 스스로 전설의 마지막 제물이 되었다.
이 모든 전쟁의 불씨를 당긴 첫 번째 희생자들도 빼놓을 수 없다. 타라소프 가문은 낡고 녹슨 왕조의 몰락 그 자체였다. 비고는 존 윅이라는 전설을 알면서도 아들 요제프의 어리석음을 막지 못했다. 그들은 헬렌이 남긴 마지막 '희망'이라는 성물을 더럽혔다. 그들의 죽음은 잊혀진 괴물을 다시 깨운 오만함이 어떤 대가를 치르는지를 보여주는, 잔혹한 동화의 첫 페이지다.
디안토니오 가문의 산티노는 또 다른 종류의 오만이었다. 그는 존 윅을 통제할 수 있는 '도구'로 여겼다. 그는 맹세의 무게를 이해하지 못했다. 전설의 힘을 자신의 야망을 위한 장기말로 착각했다. 그는 존이 돌아갈 '추억'의 신전을 파괴했다. 그의 죽음은, 부기맨은 길들일 수 없다는 이 세계의 가장 단순한 진리를 증명하며, 이 기나긴 전쟁의 2막을 열어젖혔다.
6. 우리 모두의 진혼곡
결국 모든 총성은 멎었다. 밤의 제국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고, 최고회의의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았으며, 금화는 또 다른 거래를 위해 주인을 기다릴 것이다.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보았다. 왕관을 위해 싸우지 않는 남자를. 영토를 원하지 않는 전설을.
그는 제국을 건설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아내의 이름이 새겨진 묘비 옆에 자신의 자리를 만들려던 것뿐이었다. 이 세계의 모든 이들이 더 높은 곳, 더 강한 힘을 향해 나아갈 때, 존 윅은 오직 한 사람의 기억을 향해 처절하게 걸어 들어갔다.
이제 우리는 안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남자는 잃을 것이 없는 남자가 아니었다. 오직 단 하나, 기억할 것만이 남은 남자였다는 것을. 그래서 그의 이름은 영원히 두 가지로 기억될 것이다. 세상이 두려워했던 이름, '바바 야가'. 그리고 그가 되찾고 싶었던 단 하나의 이름, '사랑하는 남편'. 이 길고 잔혹했던 밤의 끝에서, 그는 마침내 집에 돌아갔다. 우리 모두가 함께 지켜본, 한 남자를 위한 가장 길고도 아름다운 진혼곡이었다. ⓒ혁신가이드안병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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