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자 <모순>
주인공에게 바랐다. 그 남자 말고 이 남자를 선택하면 좋겠다고. 사실 결말에 이르러 내 기대가 미끄러지고 나서야 나에게 그런 바람이 있었음을 알았다. '이 남자'가 패배할 구석은 묘하게 나의 그것과도 닮아있었기 때문에 나는 주인공의 선택을 빌려 소설 말미에 작은 구원을 얻으려 했겠지. 그래 놓고선 예상하는 척 속이는 것이다. 뭐 안진진은 '이 남자'와 결혼하겠군, 선택받을만한 남자니까 말이야. 애초에 바라는 바와 예상하는 바를 쉽게 구분해내는 사람이었더라면 이런 소설쯤이야 읽지 않았을지 모른다. 왜 모순은 겪고 나서야 모순인 줄 아는 것일까.
다 읽고 추천해준 친구에게 '결말을 위한 책이었네?' 했다. 대단한 결말이 있다는 건 아니다. 작가는 마지막 장에 이르자 그러니까 내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말이지, 하면서 참았다는 듯이 쏟아내는 것 같다. 이 삶이 얼마나 속수무책으로 모순이면서도 불행의 구조는 또 아니지 않느냐고. 오히려 삶에 속았을 때 절반은 행복의 몫 아니었냐고. 돌이키건대 소설 속 대부분의 시간이 그랬듯 내가 지나는 지금이 불행인지 행복인지 그저 살뿐이었고 앞으로도 그렇다. 무언가 잘못된 것만 같은 순간이 불쑥 다가오거든 딱 한 가지, "어떤 종류의 불행과 행복을 택할 것인지 그것을 결정하는 문제뿐"일 터이니 질문은 간단해지지 않을런지.
이 책을 다시 추천하거든 너는 나영규냐고 김장우냐고 물어야겠다.
중요한 질문은 그런 것뿐이다.
삶의 어떤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으로 들을 수 없다.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우이독경, 사람들은 모두 소의 귀를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