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대치동 대신 파리나 갈까?
'그깟 문제하나가 뭐 중요하다고 빨리 씻어!'
화장도 해야 하고 꾸미기도 해야 할 텐데… 미리 미술관 입장 예약해 놓은 시간이 다가와 마음이 초조합니다. 숙제가 남았는지 문제집을 붙잡고 있어 답답합니다. 파리는 언제나 사람의 바다입니다. 전세계인이 몰리다보니 모든 일정을 늘 생각보다 빨리 서둘러야만 시간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긴 줄을 견딜 생각에... 시간이 아까워 초조하게 발만 동동 굴러봅니다.
‘계획대로 할 것 같으면 왜 여행을 왔어?’
중3 딸 Z의 대꾸입니다. '계획대로 할 것 같으면 왜 여행을 왔어?'...가만히 생각해 보니 하나도 어긋나지 않습니다. 여행의 즐거움은 '뜻밖의 의외'입니다. 일상의 평범과 반복에서 벗어나 뜻하지 않은 만남과 예상 밖의 추억을 차곡히 쌓아가는 과정이 여행입니다.
아침 알람소리에 눈을 뜨고 회사에 가고 학교를 가고 가정일을 돌보는 평범과 반복의 일상에서 조금은 한발자욱 뒤로 물러나 나를 관조하며 돌아보고 세상에 시선을 마주하는 것이 여행이라는 것을 중3딸의 댓구로 다시한번 깨닫습니다.
요즘 들어 이 친구한테 많이 배우게 됩니다. 앞으로 점점 더 그럴 테지요. 가르침보다 깨달음이 많아집니다. 그런 나이인가 봅니다. 나만 잘하면 되겠습니다.
오랑주리 미술관을 찾는 사람이라면 마음이 곱지 않은 사람이 없을겁니다. 모네의 그림을 보면 사람이 악해질 수 없기 때문이죠.
튈르리 공원의 서쪽 끝자락, 센강과 나란히 자리한 이곳 미술관은 원래 오랜지를 키우던 정원였어요. 모네가 죽기 전 자신의 그림만을 위한 전시공간을 마련해 준다면 자신의 그림을 기증하겠다는 조건이 들어맞은 결과로 만들어지게 됐답니다. 힘을 써준 사람은 모네의 오랜 친구이자 프랑스 총리를 지낸 조르주 클레망소입니다. 그래서 친구 잘 두고 볼 일입니다.
9시 30분, 벌써부터 미술관 앞은 끝도 없이 줄이 이어져 있습니다. 이 많은 사람들은 오직 딱 한 사람의 작품을 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입니다. 묘한 동질감을 느낍니다.
보안검색을 지나 미술관 안으로 들어 왔어요. 예상보다 사람들이 더 많군요.
‘좀 더 일찍 왔어야 하나?'
'조용히 의자에 앉아 감상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잠시 후회가 밀려옵니다. 마음이 좀 불편합니다. 사람 없는 텅 빈 전시실에 앉아 <수련>이 바람에 일렁이는 모습을 가슴에 품어온 탓이 클것입니다. 아니 나 홀로 그렇게 몇 번을 보아 왔기에 이번 여행에서 가족들이 내가 받았던 감동을 느끼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계획대로 할 것 같으면 왜 여행을 왔어?'
그렇습니다. 여행은 언제나 계획대로 되지 않기에 추억이 됩니다. J들은 참을 수 없겠지만 J가 P가 되는 것이 여행이라 생각합니다. 뭐 어떤가요. 어차피 100m가 넘는 이 <수련>은 한번 본다고 제대로 감동을 느낄 수는 없을테니까요. 파리에 다시 올 핑계를 하나 더 만들었으면 그만입니다. 모네의 그림이 마음을 평안히 달래줍니다.
궤도 밖에 잠시 머무는 삶을 즐겨보자.
시간이 지나니 사람들이 조금 한가해집니다. 중앙 의자에 앉아 수련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5월의 어느날 살랑이며 이는 바람에 지베르니 연못의 수련이 물결을 따라 일렁입니다. 수면으로 내려앉은 버드나무 가지도 함께 바람에 흔들립니다. 잠시 한가로운 듯...시간이 멈춘 듯... 기분이 더 없이 평안합니다. 오늘 수련에 위안을 얻습니다.
P.S.
오랑주리 미술관은 센강을 따라 두 개의 전시실로 길게 이어져 있어요. 아침에는 안쪽 전시실을 보고 오후 방문이라면 바깥 전시실을 보아야 합니다. 자연채광을 염두에 둔 미술관이기 때문이죠. 해가 뜨는 방향이 방의 안쪽, 지는 방향이 바깥방입니다. 사람이 붐빈다면 안쪽부터 보세요.
2024년 1월 5일 새벽 이상 파리에서 오지랖 특파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