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대치동 대신 파리나 갈까?
‘뮤지엄패스는 지옥행패스야’
이를 스물두 개나 들어내고 어이없이 웃으며 짝꿍이 던진 말입니다.
뮤지엄패스! 파리 여행자들의 필수 아이템입니다. 가성비에서나 시간 절약에서나 반드시 필요하죠. 파리 물가만큼이나 비싼 입장료와 태어나서 처음 겪게 되는 수많은 줄 서기를 적당히 상쇄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단점이라면, 2일, 4일, 6일 정해진 기간에 맞춰 동선을 짜고, 바쁘게 이동하고, 관람을 해야 하기 때문에 몸은 파김치가 됩니다. 도시의 산책자, 파리를 유영하는 플라뇌르가 되어 센강을 거닐고, 낡은 부키니스트를 만나고, 느긋하게 카페에 앉아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시겠다는 희망은 뮤지엄패스를 끊는 순간 지옥행 극한 여행이 되고 맙니다. 아침에 어김없이 눈을 뜨면 기계처럼 미술관과 박물관으로 향하던 4일이 오늘로 끝입니다. 어쩌면 다행입니다. 노예 해방의 기분이 이런 걸까요? 오늘만 지나면 이 지옥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다행이라면 다행, 불행이라면 불행! 예전에는 다시 보고 싶은 미술관을 기간 내에는 무제한으로 들어갈 수 있었는데 이제 그 시스템이 사라졌습니다.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오전의 <수련>과 오후에 보는 <수련>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우리들에게 전해 줍니다. 자연채광에 따라 들어오는 빛에 모네의 그림은 시간의 춤을 춥니다. 그런데 이제 이 뮤지엄패스로는 그런 감동을 느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못내 아쉽습니다. 슬프지만... 파리에서는 파리의 법을 따라야 하는 법!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도 지옥의 행군이 끝났음이 또 다른 위안이라면 위안이겠죠...
7시 50분, 서둘러 지하철역으로 이동합니다. 샤틀레 레알역에서 RER B를 타고 한 정거장 지나 생 미셸 노트르담에서 RER C로…. 그렇게 약 1시간을 달려 파리 남서쪽 20km에 위치한 베르사유에 도착! 뮤지엄패스를 마지막으로 사용합니다.
파리에 온 이래 제일 좋은 날씨입니다. 루이 14세의 기마상을 지나 커다란 포석들을 밟으며 궁전 앞으로 걸어갑니다. 아침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줄이 그리 길지 않아요. 서둘러서 오기를 잘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궁전 앞은 전 세계 사람들로 순식간에 가득합니다.
세 번째 방문입니다. 굳이 이곳에 다시 온 이유는 중3 딸에게 꼭 한번 보여주고 싶어서였습니다. 뮤지컬 <마이 앙투아네트> 배경이기도 하고, 어쩌면 베르사유의 정원이 그리워서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처음 짝꿍과 이곳에 왔을 때, 줄 서 있던 엄청난 인파를 보고 경악했던 기억이 납니다. 스마트폰이 아닌 종이 바우처를 일일이 꺼내 확인하고 들어가야 했으니 시간은 곱절로 걸리고 입장도 전에 몸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쳤습니다. 그런 탓에 아름다운 베르사유의 정원 너머 그랑 트리아농과 쁘티 트리아농을 건너뛰고야 말았습니다. 두 번째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폭우를 뚫고 대운하를 홀로 걸었습니다. 관람객 한 명 없는 어둑한 정원을 홀로 걷자니 장엄했지만 외로웠습니다. 그 두 번의 아쉬움 때문인지 오늘은 더 특별합니다. 완전체로 베르사유에 입장을 합니다.
개인이 느끼는 세월의 시간이란 한없이 길지만... 역사의 시간으로 보면 보잘것 없이 짧기에 '궁전이 많이 변했겠구나'라는 어리석을 생각과 달리 베르사유 궁은 여전히 그대로의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해 줍니다.
역시 궁전의 절정은 거울의 방입니다. 커다란 창문과 대칭을 이루는 수많은 거울들, 더 이상 화려할 수 없는 천장화와 조각상, 수백 개의 샹들리에를 보고 있으면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더욱이 오늘처럼 햇살이 좋은 날은 창문을 통해 들어온 빛이 거울에 반사되며 거울의 방 전체가 온통 금빛으로 가득 찹니다.
정원에 나왔습니다. 시선 끝까지 이어진 지평선과 그 끝까지 닿아있는 대운하를 보고 있자니 '아! 이렇게까지 큰 정원였던건가?' 연신 감탄하고 또 감탄합니다. 천천히 거닐어도 좋고, 시간이 없다면 꼬마 열차를 타고 이곳저곳을 돌아보는 것도 좋습니다. 궁전은 빠져나오며 Z는 이미 체력이 바닥이 났어요. 운하를 따라 그랑 트리아농과 쁘티 트리아농까지 걸어보고 싶지만 안 되겠습니다. 오늘만큼은 관광모드로 꼬마열차를 탑니다. 왕복 4유로면 쉽게 이동이 가능합니다.
그랑 트리아농과 쁘티 트리아농 중 쁘티 트리아농만 가기로 합니다. 그랑 트리아농은 베르사유 궁의 미니미 버전이라 생각하면 돼요. 궁전을 나와 작고 귀여운 정원까지 복사판이라 지친 친구를 생각해서 쁘티 트리아농으로 이동합니다. 역시나 잘한 결정이네요. 오늘처럼 날씨가 좋은 날에 이곳에 오길 잘했습니다. 작은 궁을 보고 나와 사랑의 신전과 마리 앙투아네트가 전원생활을 꿈꾼 작은 농가 마을을 거닙니다. 어쩌면 끝 간데없이 화려한 베르사유 궁과 대비되어 더더욱 아름다운 장소로 남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아주 완벽한 하루입니다.
쁘띠 트리아농의 산책은 아름다운 추억을 선물처럼 건네줍니다. 오솔길을 걷고 풀내음을 맡고 풀밭을 뛰어다니는 농장의 토끼와 양 떼를 보고 있자니 마음은 어느새 18세기 프랑스의 어느 평화로운 농가에 와닿게 됩니다. 파란 잉크를 맑은 물에 풀어놓듯 퍼진 하늘과 천천히 유영하는 구름 사이로 한가한 오후의 시간이 흘러갑니다. 작은 냇물은 베르사유 하늘을 온전히 그대로 품고 비추며 하늘의 거울이 됩니다.
먼 훗날에도 잊지 못할 완벽한 날입니다.
그리고...
지옥행패스가 이제 끝났습니다! 야호!
P.S.
그런 줄 알았습니다.... 만..
결국 파리로 돌아와, 서둘러 팡테옹을 보러 갑니다. 끝까지 본전을 뽑겠다는 스스로의 마음가짐이 바로 지옥행였네요...
2024년 1월 6일... 새벽에... 이상 파리 특파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