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바이칼 카약 대장정 1편 : 노어노문학과 자퇴하러 가보는 러시아
“…What a story right?”
알혼섬 3일 차, 특별한 일정 없이 후지르 마을을 떠돌 계획이었던 나는 두 누나의 손에 이끌려 카약을 타러 가고 있었다. 일평생 물속에 있어야 하는 그 무엇도 해본 적이 없는 내가, 인생 첫 번째 카약을, 무려 바이칼에서? 적잖이 당황스러운 제안이었지만, 그런 내 마음을 전혀 모르는 것 같은 유정과 비비안은 어서 ‘around the Baikal’ 말고 ‘in to the Baikal’ 하자며 웃고 있었다.
유정과 비비안은 전날 북부투어에서 친해진 누나들이다. 특히 블라디보스토크 근처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중국인 비비안은 뻔한 여행기에서나 나올 것 같은 ‘알고 보니 그 사람이었네’ 식의 인연이었다. 알혼섬으로 향하는 버스에 조금 늦게 도착했었던 아시아계 여자분이 바로 비비안이었던 것! 알고 보니 리셉션과 출발 시간에 대한 오해가 있었다며 물어보기도 전에 엄청 억울해했었다. 역시 전후 사정을 모두 알 필요가 있나 보다.
정리하면, 이르쿠츠크와 알혼섬 모두 같은 일정으로 같은 숙소를 사용했고, 알혼섬으로 오는 버스와, 북부투어 팀까지 겹친 것이다. 그 수많은 회색 버스 중에서도 같은 차까지 겹쳤다니, 초보 여행자인 나한테도 이런 우연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심지어 버스 안에서도 옆 자리에 있어서 국립공원 입장료(투어비와 별도로 현장에서 지불해야 함)를 어설프게 통역해 주며 말을 튼 것을 시작으로, 사진도 찍어주고 각자의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랜덤으로 구성되는 팀에 부담이 없었던 건 아닌데, 이렇게 되면 시작이 참 좋았다.
어쩌다 보니 나와 비비안과 같이 앉게 되었던 유정은 캐나다에서 온 한인 2세였다. 나보다 키가 커서인지 왠지 모를 비장함이 있었는데. 점차 그것이 정확했다는 걸 느꼈다. 세계 각지에서 ‘1년만’ 일하고, 그곳을 거점으로 ‘1년 간’ 세계일주를 다니고 있는 엄청난 사람였으니까. 부모님께서 걱정하시지 않냐는 질문에 집에만 있는 게 가장 싫다며, 항상 저지른 후에 통보하는 편이라고 웃으며 대답했다. 항상 긴장하고 지내던 초보 여행자였던 나에겐 대단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수상 레포츠는 스물셋 먹도록 생각해 본 적도 없다. 16살엔 미국 사는 사촌 집 뒷마당에 있던 수영장에 거하게 빠졌고, 그보다 더 어릴 땐 혼자 조용히 보글거리고 있던 나를 누가 건져준 이후로 물 근처도 잘 안 간다고 하니, 두 명 다 웃으면서 카‘누’는 뒤집어지는데 카‘약’은 그럴 일이 없다고 했다. (아직도 둘의 차이는 잘 모르겠지만, 타보니 카'약'은 웬만큼 파도가 세지 않은 시아 뒤집어지기 힘든 구조인 것 같기는 했다.)
‘그게 대수입니까?!’라는 말을 어떻게 완곡한 영어로 표현할지 고민하는 동안에도, 누나들은 3인용 카약이 너무 재밌겠다며(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겠냐고 생각했다. 다음 날에 조정할 때 탈 것 같은 배를 타게 됐지만..) 싱글벙글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단 적당히 둘러댄 뒤, 방에 돌아오자 유정의 긴 카톡이 왔다.
Ryan, there’s no way you are scared of water and you’re from Busan. I can’t swim but I will drag you in your life jacket to the shore if anything bad happens but I know nothing bad ever happens. If it does, you have an adventure story to tell your friends and family when you return home. And you will become someone that almost drowned in cold Siberian water. What a story right? And you can show people how you overcame your fear of water!
여러분이라면 어떤 기분이 들 것 같은가? 고마움? 당연하다. 제일 처음 든 생각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단순히 ‘고마운 사람이네’라는 표현만으로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유정은 나를 오늘 처음 만났다. 잠깐 겹친 서로의 시간이 끝나면 우연히 마주칠 일도 없을 것이다. 카약? 마찬가지다. 안 타겠다는 사람 굳이 설득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하지만 유정은 나와 다른 사람이었다. 내가 한 발짝 나아가지 못했던 일들을 해낼 용기를 가진 사람이라서, 나보다 한 발짝 더 큰 시선을 내게 나눠줄 수 있었다.
결국 같이 가자고 답장했지만, 두 가지 고민을 오래도록 해결하지 못하고 잠을 설쳐야 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이 지난 1년의 나 자신과, 내 여행 속에 정말 조심스럽게 숨겨두었던 것들을 날카롭게 관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어코 밖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품고만 있었던 미운 마음들.
‘나는 그럴 수 있을까? 아니,
‘나는 그 호의를 받을 자격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