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바이칼 호수 후지르 마을편 : 노어노문학과 자퇴하러 가보는 러시아
횡단열차 여행이 생각보다 예산이 적게 드는 이유는 숙박비를 아낄 수 있기 때문이다. 11개 도시나 정차했던 나조차도 한 번 타면 1일, 2일씩 가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르쿠츠크나 모스크바 정도만 정차하는 경우엔 4-5일씩 타는 경우도 많으니 필히 더 아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보통 체크아웃을 마치고 역에 가방을 맡긴 후에, 마지막 날도 밤기차 시간까지 꽉 채워서 곳곳을 둘러보곤 했다. 하지만 유일하게 장기 노선 중 아침 기차를 택한 구간이 있었는데, 바로 울란우데에서 이르쿠츠크로 향하는 8시간의 기차였다. 바로 바이칼 호수 때문이었다. 창밖으로 햇살이 부서지는 아주 푸른 바이칼 호수를 보고 싶었다. 그것도 아주 팔자 좋게 에어컨이 나오는 횡단열차 내 자리에 발 뻗고 누워서 말이다.
울란우데 트래블러스 호스텔의 아나스타샤, 이반에게 준비해 온 엽서와 캘리그래피를 선물하고선 역으로 향했다. 이틀 전 건넜던 육교엔 아직도 고양이를 찾는 전단이 붙어 있었다. 육교를 다 건널 때쯤 뒤로 돌아 울란우데의 첫 모습을 다시 마주했다. 육교 아래의 화물 열차들이 양방향으로 오가듯, 울란우데에서의 첫 순간과 마지막 순간도 교차하고 있었다. 내가 떠나면 다른 누군가가 오겠지. 어쨌든 내 몫의 여행은 계속되어야 했다.
이제 한 두 번 해보았다고 익숙하게 기차에 올라 자리에 누우니 모든 게 완벽했다. 뽀송뽀송한 신식 기차엔 에어컨이 빵빵했고, 누워서 바라본 창문엔 보정을 엄청 잘한 것 같은 맑은 하늘이 흘러갔다. 외국 하늘은 더 맑은 것 같다는 말이 진짜인지,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러시아는 그랬다. 머지않아 바이칼도 보이기 시작했다. ‘저게 진짜 물 색깔인가?’ 의심하게 만드는 맑은 색깔, '이게 바다가 아니라 진짜 호수가 맞나?' 놀랄 수밖에 없는 크기의 호수엔 웃통을 벗은 아이들이 첨벙거리고 있었다. 그런 경치가 낮잠을 푹 자고 일어나도 이어졌다. 일기를 쓴다면 '호수를 봤다'는 문장으로 끝날 것 같은 깔끔한 하루.
그렇게 노을이 가라앉을 때쯤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 아무래도 규모가 있다 보니 울란우데보단 북적이는 느낌이었는데, 특히 나를 노리던 택시 호객이 꽤 많았다. 속은 상당히 쫄아 있었지만 적당히 죄송하다고 말하곤 큰길로 나가 막심(택시어플)을 켰고, 미하일이라는 이름의 정말 잘생긴 기사 분의 회색 차량을 타고 숙소로 향했다. 외모와 달리 운전은 너무 거칠었지만, 그 마저도 너무 억세서 겨울에도 얼지 않는다던 앙가라강과 어울리는 듯했다. 늘 실망시키지 않는 것이 또 러시아스러워서 괜찮았고. 또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손잡이를 꼭 잡을 뿐이었다. 시내로 들어가는 다리 위에서 앙가라강의 노을을 보며 세 번째 도시, 이르쿠츠크를 마주했다.
운전대만 잡으면 사람이 달라지는듯한 미하일은 어플에 적힌 호스텔 이름을 꽤 오래 찾더니 ‘아마도 저 문으로 들어가면 될 것 같다’며(진짜 친절한데 표정은 여전히 없음) 간판도 보이지 않는 무뚝뚝한 철문 앞에 역시나 무뚝뚝하게 내려주었다. 일정 중 가장 좋았던 두 숙소 중 하나, 롤링스톤즈 호스텔과의 만남이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외국 호스텔 특유의 ‘빼애액’ 소리가 났고, 'Come in!'이라는 말과 함께 그 두꺼운 철문이 열렸다.
롤링스톤즈 호스텔은 한 마디로 평가할 수 있다. 부킹닷컴 9.7! 모든 부분에서 ‘이러면 남는 게 있나?’싶을 정도였지만, 이 부분은 이르쿠츠크 편에서 다룰 예정이다. 후기에서도 알 수 있지만 가장 편했던 점은 알혼섬으로 향하는 왕복 티켓을 비교적 싼 가격에 살 수 있었던 점이다. 심지어 롤링스톤즈 문 앞에서 타서, 알혼섬 숙소 앞까지 데려다 주기 때문에 알혼섬에서 길을 헤맬 염려도 전혀 없었다. 다음날 아침, 터미널 한복판에서 ‘알혼!!!’이라 소리 지를 계획(이게 거의 정석루트)이었기 때문에 조금은 편하게 잠에 들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최소한의 식사를 마치고 지사제를 먹었다. 무려 6시간 동안 버스를 타야 했기 때문. 바이칼을 방문한 관광객은 호수를 끼고 있는 마을 리스트비얀카와 호수 속 알혼섬 중 하나를 선택하는데, 보통은 1시간 거리의 리스트비얀카를 방문한다. 알혼섬은 왕복으로 12시간이나 걸리기 때문에 최소 2-3박을 추가해야 하는 부담이 있는데, 심지어 대부분 비포장도로라서 웬만큼 멀미에 강하지 않으면 비추천하는 루트이기도 하다. 하지만 시간은 넘치며 겁은 없었던 난 호수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택했다. 다행히도 멀미엔 강하지만, 안 다행히도 급똥은 무서웠던 나는 제발 대자연 한가운데서 세워달라는 일은 없길 바라며 짜 먹는 지사제를 삼켰다.
롤링스톤즈에서 출발한 버스는 아시아계 여자 한 분이 늦게까지 나오지 않아 약간의 소동을 빚은 후에 도시를 벗어났다. 울란우데에서 버스를 탔을 때처럼 가방을 꼭 안고 있긴 했지만, 이번엔 남몰래 노래도 흥얼거릴 정도로 컨디션이 좋았다. 모든 게 처음은 무섭고, 그다음엔 조금 낫다는 걸 몸으로 느끼는 건 큰 경험이고 성장이었다. 이쯤 되면 잘난 여행자가 된 것만 같았고, 나름 콧대 높이고 자랑할 만한 오지로 향하는 여행자 리스트에 내 이름도 작게 올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그 사이 초원을 지나 잠시 배도 탔고, 비포장도로까지 덜컹거리며 나아간 끝에 알혼섬 후지르 마을의 숙소에 도착했다. 굉장히 전통적인 느낌의 목재 오두막, 현지메뉴로 식사도 제공하고, 대충 '니키타'라고 하면 업계사람들(?)은 모두 알아 들어서 관광하기도 편했지만, 무엇보다 뒷마당만 가도 바이칼이 한 번에 펼쳐지는 점이 큰 장점이었던 니키타하우스였다. 입구를 찾던 내 옆으로 소 한 마리가 아무렇지 않게 지나갔지만, 당황하지 않기로 하며 짐을 던져두고 호수로 뛰어갔다. 바이칼, 바이칼, 바이칼! 내가 꿈꾸던 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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