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넓은 호수와, 정말 높은 언덕에, 정말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없었다. 자연이 자연스러워서 좋았던 곳. ⓒboybeen
후지르 마을 대부분의 숙소에서 섬 투어를 신청할 수 있는데, 차는 모두 동글동글한 회색차다. ⓒboybeen
무뚝뚝한 가이드 아저씨가 무심하게 툭 내려주시면 이런 풍경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담수호는 이렇게 생겼다. ⓒboybeen
언젠가 에어컨 바람에 축 늘어진 채 영일대해수욕장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휴양지에 사는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하나도 특별하지 않은 해수욕장 옆 도로 위에서 누군가가 무언가를 타고 한여름의 바다를 가르는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엄마는 문득 바다가 없는 도시에선 답답해서 살 수가 없다는 ‘너희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다. 그럴 만도 했다. 우리 아빠는 어린 시절은 울진과 영덕에서, 젊은 시절은 LA에서, 그 이후는 포항에서 살아오고 있다. 말 그대로 일평생을 바다 곁에 계셨던 분이었다. 아직까지도 유독 거칠고 화끈한 성격이 젊었을 땐 더 했다고들 하니, 필히 태평양의 거친 파도가 아빠의 삶에 영향을 줬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그 부분이 나랑 너무나도 달랐다는 점이다. 포항을 떠나 대학교 앞에서 자취를 시작하기 전까지, 그러니까 고등학교 시절까지만 해도 아빠와 나는 도무지 닮은 구석을 찾을 수가 없었다. 성격은 물론이거니와, 사소하게는 식습관, 단어 선택, 운동 신경까지 주변 사람들이 신기하다 할 정도로 겹치는 부분을 찾기가 힘들었다. 이 부분은 아주 어릴 적부터 늘 부자(父子) 관계를 흩트리곤 했고, 늘 사춘기 시절 남들은 모를 고민으로 이어져 왔다. 남들도 다 하는 고민이라지만, 그렇다고 내 고민이 가볍지는 않은 것들 말이다.
이런 내가 아빠를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스무 살 무렵이었는데, 여행 제목처럼 진로와 진학에 대한 고민이 많았던 그 시절에도 곳곳에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는 이유만으로 부산대가 좋아졌기 때문이다. 한국의 대학교가 으레 그렇듯 부산대도 급경사로 유명했는데, 부산에서 가장 큰 산을 끼고 있었던 덕인지 학교 곳곳에 계곡이 흘렀다. 그 옛날 낭만의 시대에는 입수도 가능했을 것 같은 '콸콸콸' 수량이었으니 보는 재미도 있었다. 대학 시절엔 매일 아침마다 미리내골의 작은 물고기들이 잘 지내는지 확인하며(겨울에는 안 보이다가 봄이 되면 또 어디선가 나타난다), 비 온 다음날에 물이 마구 쏟아지는 걸 보면서 괜히 좋아하곤 했다.
바이칼 호수는 샤머니즘의 발원지로도 불리며, 곳곳에서 의식을 위한 부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boybeen
샤머니즘 의식을 위한 천조각이 달린 솟대 '세르게'가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boybeen
그래서인지 내 여행지도 항상 물이 흐르는 곳이었다. 꼭 바다가 아니어도 강이나, 호수가 있는 곳들만 찾아다녔다. 그런 의미에서 20살에 처음 간 강릉은 호수와 바다가 마주 보고 있었으니 최고의 여행지였다. 아무튼 의도했던 바는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그런 일정을 짜고 있었고, 그런 곳들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이칼은 아니었다. 이번 여행 일정에서 가장 기대하고, 사심을 가장 가득 담아 의도적으로 넣은 일정이었다. 자그마치 4일이라는 시간을 써가며 바이칼을 마주하고 싶었다. 내가 본 물 중에서 가장 큰 물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지 상상하며 오늘을 기다려온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 순간을 온전히 표현해 낼 자신이 없다. 숙소 울타리 너머로 석양과, 그 석양을 담아낸 물빛이 울렁이는 게 보이자마자 문득 걱정이 들었다. 엄청난 게 나올 것 같은데, 난 대체 어떤 리액션을 해야 할까? 근데 그 걱정만큼이나, 결국 책과 블로그로만 보던 이곳에 왔다는 사실이 재밌고, 또 뿌듯하기도 했다. 그래서 조금은 떨리는 손으로 엉성하지만 소리는 컸던 울타리 문을 세게 당겼다. 벅찰 만큼 아름답고 거대한 풍경을 마주할 때면 흔히들 ‘쏟아진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그 풍경 속으로 ‘쏟기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빠져들고 싶은 마음에 숨이 찰 만큼 절벽을 따라 뛰었다. 샤먼바위를 끼고 완만한 곡선으로 모래사장이 이어졌고, 수평선 너머로 어렴풋하게 보이는 산맥만 아니면 바다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거대한 물이 흐르고 있었다.
모든 투어 차량이 같은 색깔, 같은 차종이기에 번호를 잘 봐두어야 한다. ⓒboybeen
투어 막바지에 보았던 바위. 이름은 모르지만 이쯤 되니 다른 승객들과도 친해져서 모두 다 같이 다녔던 기억은 있다. 말은 하나도 안 통했지만. ⓒboybeen
바다인 줄 알았던 호수, 바다만큼 큰 호수는 결국 호수다. 하지만 그 말이 기어코 바다를 이겨보려다 실패한 존재라는 뜻이 될 수는 없다. 우리는 흔히 은유와 비유를 아는 사람만 알아듣는, 완만히 표현하는 비교 정도로 받아들이는 실례를 저지르곤 한다. 그래서 나는 바이칼을 호수다운 호수라고 말하고 싶다. 바다와 착각할 정도로 크긴 했지만, 호수처럼 천천히 자신을 흘려보내며, 그만큼 조심스러운 바람을 보낼 줄 아는 장소였다.
품지 못할 만큼 커서, 나처럼 겁도 많고 수영도 못하는 작은 사람은 발 담그기도 두려워지는 바다와는 달랐다. 바이칼은 ‘그래도 이 만큼은 줄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손에 쥐어주는 위로 같은 곳이었다. 바다를 욕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아빠같이 강한 스포츠맨이라면, 거센 파도를 이겨내고 싶은 열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에 상응하는 도전의 기회를 주는 것이 바다인 것 같다. 아빠는 바다 같은 삶을 살아왔고, 나는 호수 같은 사람을 꿈꾸는 아들이었다. 스물셋의 바이칼, 나는 우리 부자가 비슷한 듯 달랐던 이유를 뒤늦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다음 날 덜컹거리는 회색 승합차를 타고 섬 북쪽을 한 바퀴 도는 ‘북부투어’를 통해 보다 깊은 바이칼을 느꼈다. 안전장치라고는 울타리조차도 없는 곳곳의 오지에서 정말 자연스러운 자연을 마주할 수 있어서 좋았다. 지금까지 한 명은 떨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들었지만, 일단 나의 하루에 그런 일은 없어서 다행이었던 하루. 사실 투어비 1000루블(한화 약 2만원)에 포함된 식사를 언급하고 싶은데, 기사님이 열심히 만든 샌드위치와 생선국은 지금껏 먹은 음식 중에 가장 투박했지만 기분 좋아지는 맛(사실 맛은 없었음)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투어 팀은 이처럼 다 다른 곳에서 올 수 있나 싶은 신기한 조합이었고, 리셉션의 설명과 달리 기사님은 투어 가이드를 해주시진 않았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때론 숱한 설명보다 장소 그 자체를 즐기고 싶을 때가 있으니까.
기사님이 열심히 만들어 주신 생선국과 샌드위치. 가끔은 맛보다 정성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요리가 있다. ⓒboybeen
하루 만에 또 석양으로 물든 바이칼 앞에 앉았다. 바이칼은 여전했다. 오늘은 어땠냐고 묻지도 않았고, 네가 올 줄 알았다며 지나치게 꾸미지도 않았다. 시간에 따라 변하는 하늘을 담고 조금씩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저 멀리에 천천히 나아가는 패들보트와 소란스럽게 수영하는 사람들을 보았고, 아마 바이칼도 그러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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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박 34일,
11개의 도시와 바이칼호수까지!
10,000Km를 넘게 달렸던
2018년 스물셋 여름날의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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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프롤로그 : 좋아할 수 있는 일만 하며 살아가고 싶은데, 전공자도 전공자라서 러시아는 무서워요
02 동해항 : 배 타고 러시아 가는 건 영화에서나 봤지
03 블라디보스토크 1편 : 반가움에 '끝내주는 가게'를 소개해주겠다는 술 취한 현지인
04 블라디보스토크 2편 : 잘못 부른 택시가 폭우 속에 20분을 기다리다
05 울란우데 도시편 : 전 세계에서 가장 큰 42톤 짜리 레닌 두상이 있는 도시
06 울란우데 이볼긴스키 다짠편 : “다 끝내고 다시 시작할거야.” 사연 있는 현지인과 사찰을 걷다
07 울란우데 린포체 박샤 다짠편 : 부산(釜山) 사람은 평원에 약해
08 바이칼 호수 알혼섬 후지르마을 입성편 : 편도 6시간, 알 사람은 안다는 호수의 섬
09 바이칼 호수 북부 투어편 : 바다가 없으면 답답하다는 아빠를 호수에서 이해하다
10 바이칼 호수 알혼섬 카약 대장정 1편 : 수영은 못 해도 무작정 IN THE BAIKAL
11 바이칼 호수 알혼섬 카약 대장정 2편 : 카약도, 인생도 뒤집어지기는 쉽지 않아
12 이르쿠츠크 1편 : 유배자들이 일군 시베리아의 파리에서 좋은 학생으로 인정받다
13 이르쿠츠크 2편 : 유노스찌(젊음)섬, 청춘은 그 자체로 노 프라블럼
14 시베리아 횡단열차 : 러시아 군인 앞에서 꺼낸 K-POP이 왜 하필 ‘이등병의 편지’였을까
15 노보시비르스크 : ‘노잼도시’에도 사람은 산다, 그래서 재밌다
16 예카테린부르크 1편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서 마이클 잭슨을 기념하다
17 예카테린부르크 2편 : 치킨텐더를 시켜서 닭날개를 받아도 맛있는 게 여행이다
18 카잔 1편 : 자퇴한다더니 교환학생의 도시를 예습해도 되는 걸까
19 카잔 2편 : 정교회 성당 옆 이슬람 사원에서 느껴보는 연방국의 넓이
20 니즈니노브고라드 : 러시아에서 조국을 수호한 날에 한국 예비군으로서 축하를 받은 사연
21 황금고리 1편 블라디미르 : 으슥한 식당 한 구석 오크통에서 꺼낸 꿀술, 메도부하
22 황금고리 2편 수즈달 : 1,000년 전 방어요새도 이제는 선베드 명당
23 모스크바 1편 : 러시아어 전공자면 성 바실리 성당 앞에서 울어도 주책은 아니지?
24 모스크바 2편 : 모스크바의 871번째 생일, “오늘 모스크바는 잠들지 않습니다.”
25 모스크바 3편 : 지방 사람은 서울 한 번도 결심이 필요한데, 모스크바는 어떻겠어
26 모스크바 4편 : DIY가 취미가 아니라면 마트료시카는 꼭 열어보자
27 상트페테르부르크 1편 :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28 상트페테르부르크 2편 : 책을 산 게 죄고, 읽는 게 벌이라던 <죄와 벌> 따라 ‘도망’가기
29 상트페테르부르크 3편 : 비행기 시간 남았으면 투어 시켜줄게, 마지막 택시기사님의 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