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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ybeen Mar 02. 2024

편도 6시간, 알 사람은 안다는 바이칼 호수의 섬

#8 바이칼 호수 후지르 마을편 : 노어노문학과 자퇴하러 가보는 러시아

후지르 마을에서 가장 유명한 숙소인 니키타 하우스 앞에서 찍은 사진. 왼쪽의 솟대는 실제로 한국어로 솟대라 적혀 있다. ⓒboybeen


횡단열차 여행이 생각보다 예산이 적게 드는 이유는 숙박비를 아낄 수 있기 때문이다. 11개 도시나 정차했던 나조차도 한 번 타면 1일, 2일씩 가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르쿠츠크나 모스크바 정도만 정차하는 경우엔 4-5일씩 타는 경우도 많으니 필히 더 아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보통 체크아웃을 마치고 역에 가방을 맡긴 후에, 마지막 날도 밤기차 시간까지 꽉 채워서 곳곳을 둘러보곤 했다. 하지만 유일하게 장기 노선 중 아침 기차를 택한 구간이 있었는데, 바로 울란우데에서 이르쿠츠크로 향하는 8시간의 기차였다. 바로 바이칼 호수 때문이었다. 창밖으로 햇살이 부서지는 아주 푸른 바이칼 호수를 보고 싶었다. 그것도 아주 팔자 좋게 에어컨이 나오는 횡단열차 내 자리에 발 뻗고 누워서 말이다.

  

울란우데 트래블러스 호스텔의 아나스타샤, 이반에게 준비해 온 엽서와 캘리그래피를 선물하고선 역으로 향했다. 이틀 전 건넜던 육교엔 아직도 고양이를 찾는 전단이 붙어 있었다. 육교를 다 건널 때쯤 뒤로 돌아 울란우데의 첫 모습을 다시 마주했다. 육교 아래의 화물 열차들이 양방향으로 오가듯, 울란우데에서의 첫 순간과 마지막 순간도 교차하고 있었다. 내가 떠나면 다른 누군가가 오겠지. 어쨌든 내 몫의 여행은 계속되어야 했다.


이르쿠츠크에서 알혼섬으로 향하는 6시간 중 2시간 정도만 이렇고, 4시간은 완전 덜컹거리는 흙길이다. 앞 유리가 깨져 있는 와일드함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boybeen
알혼섬은 당연히도 섬이라서, 배를 차에 실어서 들어가야 한다. 타고 있어야 하나? 고민했는데 내리는 분위기였다. ⓒboybeen


이제 한 두 번 해보았다고 익숙하게 기차에 올라 자리에 누우니 모든 게 완벽했다. 뽀송뽀송한 신식 기차엔 에어컨이 빵빵했고, 누워서 바라본 창문엔 보정을 엄청 잘한 것 같은 맑은 하늘이 흘러갔다. 외국 하늘은 더 맑은 것 같다는 말이 진짜인지,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러시아는 그랬다. 머지않아 바이칼도 보이기 시작했다. ‘저게 진짜 물 색깔인가?’ 의심하게 만드는 맑은 색깔, '이게 바다가 아니라 진짜 호수가 맞나?' 놀랄 수밖에 없는 크기의 호수엔 웃통을 벗은 아이들이 첨벙거리고 있었다. 그런 경치가 낮잠을 푹 자고 일어나도 이어졌다. 일기를 쓴다면 '호수를 봤다'는 문장으로 끝날 것 같은 깔끔한 하루.


니키타하우스의 장점은 뒷마당이 바로 호수라는 점. 조명은커녕 울타리 같은 안전장치도 없는 '쌩자연'이 바로 펼쳐진다. ⓒboybeen
후지르 마을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소. 별일 없다는 듯 지나가면, 소도 별일 없구나 하며 갈 길을 간다. ⓒboybeen
첫날 저녁 해가 꼬박 넘어갈 때까지 호수 앞에 앉아 있었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군'의 연속이었던 여행 중에서도 특히 '어쩌다'였던 하루. ⓒboybeen


그렇게 노을이 가라앉을 때쯤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 아무래도 규모가 있다 보니 울란우데보단 북적이는 느낌이었는데, 특히 나를 노리던 택시 호객이 꽤 많았다. 속은 상당히 쫄아 있었지만 적당히 죄송하다고 말하곤 큰길로 나가 막심(택시어플)을 켰고, 미하일이라는 이름의 정말 잘생긴 기사 분의 회색 차량을 타고 숙소로 향했다. 외모와 달리 운전은 너무 거칠었지만, 그 마저도 너무 억세서 겨울에도 얼지 않는다던 앙가라강과 어울리는 듯했다. 늘 실망시키지 않는 것이 또 러시아스러워서 괜찮았고. 또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손잡이를 꼭 잡을 뿐이었다. 시내로 들어가는 다리 위에서 앙가라강의 노을을 보며 세 번째 도시, 이르쿠츠크를 마주했다.


운전대만 잡으면 사람이 달라지는듯한 미하일은 어플에 적힌 호스텔 이름을 꽤 오래 찾더니 ‘아마도 저 문으로 들어가면 될 것 같다’며(진짜 친절한데 표정은 여전히 없음) 간판도 보이지 않는 무뚝뚝한 철문 앞에 역시나 무뚝뚝하게 내려주었다. 일정 중 가장 좋았던 두 숙소 중 하나, 롤링스톤즈 호스텔과의 만남이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외국 호스텔 특유의 ‘빼애액’ 소리가 났고, 'Come in!'이라는 말과 함께 그 두꺼운 철문이 열렸다.


롤링스톤즈 호스텔은 한 마디로 평가할 수 있다. 부킹닷컴 9.7! 모든 부분에서 ‘이러면 남는 게 있나?’싶을 정도였지만, 이 부분은 이르쿠츠크 편에서 다룰 예정이다. 후기에서도 알 수 있지만 가장 편했던 점은 알혼섬으로 향하는 왕복 티켓을 비교적 싼 가격에 살 수 있었던 점이다. 심지어 롤링스톤즈 문 앞에서 타서, 알혼섬 숙소 앞까지 데려다 주기 때문에 알혼섬에서 길을 헤맬 염려도 전혀 없었다. 다음날 아침, 터미널 한복판에서 ‘알혼!!!’이라 소리 지를 계획(이게 거의 정석루트)이었기 때문에 조금은 편하게 잠에 들 수 있었다.


가로등도 거뭇거뭇한 시골 동네의 저녁은 유독 길다. ⓒboybeen
바이칼이 워낙 잔잔하다 보니 바로 앞에서 캠핑을 하는 분들도 종종 보였다. ⓒboybeen
규모에서 오는 신비로움은 태곳적에도 그랬던 듯 바이칼 무속 신앙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boybeen


다음 날 아침, 최소한의 식사를 마치고 지사제를 먹었다. 무려 6시간 동안 버스를 타야 했기 때문. 바이칼을 방문한 관광객은 호수를 끼고 있는 마을 리스트비얀카와 호수 속 알혼섬 중 하나를 선택하는데, 보통은 1시간 거리의 리스트비얀카를 방문한다. 알혼섬은 왕복으로 12시간이나 걸리기 때문에 최소 2-3박을 추가해야 하는 부담이 있는데, 심지어 대부분 비포장도로라서 웬만큼 멀미에 강하지 않으면 비추천하는 루트이기도 하다. 하지만 시간은 넘치며 겁은 없었던 난 호수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택했다. 다행히도 멀미엔 강하지만, 안 다행히도 급똥은 무서웠던 나는 제발 대자연 한가운데서 세워달라는 일은 없길 바라며 짜 먹는 지사제를 삼켰다.


롤링스톤즈에서 출발한 버스는 아시아계 여자 한 분이 늦게까지 나오지 않아 약간의 소동을 빚은 후에 도시를 벗어났다. 울란우데에서 버스를 탔을 때처럼 가방을 꼭 안고 있긴 했지만, 이번엔 남몰래 노래도 흥얼거릴 정도로 컨디션이 좋았다. 모든 게 처음은 무섭고, 그다음엔 조금 낫다는 걸 몸으로 느끼는 건 큰 경험이고 성장이었다. 이쯤 되면 잘난 여행자가 된 것만 같았고, 나름 콧대 높이고 자랑할 만한 오지로 향하는 여행자 리스트에 내 이름도 작게 올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니키타하우스의 영 불친절한 스태프가 설명해 준 투어 일정표. 불친절과 무례 중에서는 불친절이었으니 그걸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boybeen


그 사이 초원을 지나 잠시 배도 탔고, 비포장도로까지 덜컹거리며 나아간 끝에 알혼섬 후지르 마을의 숙소에 도착했다. 굉장히 전통적인 느낌의 목재 오두막, 현지메뉴로 식사도 제공하고, 대충 '니키타'라고 하면 업계사람들(?)은 모두 알아 들어서 관광하기도 편했지만, 무엇보다 뒷마당만 가도 바이칼이 한 번에 펼쳐지는 점이 큰 장점이었던 니키타하우스였다. 입구를 찾던 내 옆으로 소 한 마리가 아무렇지 않게 지나갔지만, 당황하지 않기로 하며 짐을 던져두고 호수로 뛰어갔다. 바이칼, 바이칼, 바이칼! 내가 꿈꾸던 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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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박 34일,

11개의 도시와 바이칼호수까지!

10,000Km를 넘게 달렸던

2018년 스물셋 여름날의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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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프롤로그 : 좋아할 수 있는 일만 하며 살아가고 싶은데, 전공자도 전공자라서 러시아는 무서워요

02 동해항 : 배 타고 러시아 가는 건 영화에서나 봤지

03 블라디보스토크 1편 : 반가움에 '끝내주는 가게'를 소개해주겠다는 술 취한 현지인

04 블라디보스토크 2편 : 잘못 부른 택시가 폭우 속에 20분을 기다리다

05 울란우데 도시편 : 전 세계에서 가장 큰 42톤 짜리 레닌 두상이 있는 도시

06 울란우데 이볼긴스키 다짠편 : “다 끝내고 다시 시작할거야.” 사연 있는 현지인과 사찰을 걷다

07 울란우데 린포체 박샤 다짠편 : 부산(釜山) 사람은 평원에 약해

08 바이칼 호수 알혼섬 후지르마을 입성편 : 편도 6시간, 알 사람은 안다는 호수의 섬

09 바이칼 호수 북부 투어편 : 바다가 없으면 답답하다는 아버지를 호수에서 이해하다

10 바이칼 호수 알혼섬 카약 대장정 1편 : 수영은 못 해도 무작정 IN THE BAIKAL

11 바이칼 호수 알혼섬 카약 대장정 2편 : 카약도, 인생도 뒤집어지기는 쉽지 않아

12 이르쿠츠크 1편 : 유배자들이 일군 시베리아의 파리에서 좋은 학생으로 인정받다

13 이르쿠츠크 2편 : 유노스찌(젊음)섬, 청춘은 그 자체로 노 프라블럼

14 시베리아 횡단열차 : 러시아 군인 앞에서 꺼낸 K-POP이 왜 하필 ‘이등병의 편지’였을까

15 노보시비르스크 : ‘노잼도시’에도 사람은 산다, 그래서 재밌다

16 예카테린부르크 1편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서 마이클 잭슨을 기념하다

17 예카테린부르크 2편 : 치킨텐더를 시켜서 닭날개를 받아도 맛있는 게 여행이다

18 카잔 1편 : 자퇴한다더니 교환학생의 도시를 예습해도 되는 걸까

19 카잔 2편 : 정교회 성당 옆 이슬람 사원에서 느껴보는 연방국의 넓이

20 니즈니노브고라드 : 러시아에서 조국을 수호한 날에 한국 예비군으로서 축하를 받은 사연

21 황금고리 1편 블라디미르 : 으슥한 식당 한 구석 오크통에서 꺼낸 꿀술, 메도부하

22 황금고리 2편 수즈달 : 1,000년 전 방어요새도 이제는 선베드 명당

23 모스크바 1편 : 러시아어 전공자면 성 바실리 성당 앞에서 울어도 주책은 아니지?

24 모스크바 2편 : 모스크바의 871번째 생일, “오늘 모스크바는 잠들지 않습니다.”

25 모스크바 3편 : 지방 사람은 서울 한 번도 결심이 필요한데, 모스크바는 어떻겠어

26 모스크바 4편 : DIY가 취미가 아니라면 마트료시카는 꼭 열어보자

27 상트페테르부르크 1편 :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28 상트페테르부르크 2편 : 책을 산 게 죄고, 읽는 게 벌이라던 <죄와 벌> 따라 ‘도망’가기

29 상트페테르부르크 3편 : 비행기 시간 남았으면 투어 시켜줄게, 마지막 택시기사님의 호의

30 에필로그 : 스물셋의 나름 괜찮았던 한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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