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울란우데 린포체 박샤 다짠편 : 노어노문학과 자퇴하러 가보는 러시아
이볼긴스키 다짠을 한 바퀴쯤 더 둘러보고 울란우데로 돌아왔다. 처음이 어렵지 돌아오는 건 쉬웠다. 하지만 그것조차 나름 큰 모험이었는지 소비에트 광장에 도착해 레닌 두상과 눈이 마주치니 반갑기까지 했다. 배가 살짝 고팠지만 해가 지기 전에 일정을 마치고 싶어 서둘러 린포체 박샤 다짠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더니, 직행 노선은 아닌 듯 울란우데 도심 구석구석까지 볼 수 있었다. 애매하게 포장된 도로는 모랫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맑고 건조한 공기가 이들에게도 상쾌했던지 여전히 무표정한 사람들도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감천문화마을, 산복도로와 비슷한 분위기의 높은 언덕으로 오르기 시작하자 목조 건물들이 빼곡히 지나갔다. 도심과는 다른 분위기, 어쩌면 진짜 울란우데일 수 있는 풍경들이었다. 꼬질꼬질한 동네길엔 꽃을 한가득 안고 어딘가로 돌아가는 아주머니, 그 아주머니의 손을 잡고 돌멩이를 걷어차며 걸어가는 어린아이, 모자(母子)를 지켜보는 노부부가 있었다. 혼자서도 산책을 잘 다니는듯한 동네 개들은 털레털레 걸어가다 애교를 부리곤 간식을 얻어먹거나, 철퍼덕 엎어져서는 차든 사람이든 상관없다는 듯 자고 있었다.
'이런 순간들이 내가 기대했던 진짜 러시아의 일상인 걸까' 생각이 드니 괜히 기분이 좋아졌는데, 여행을 마친 지금 생각해 보니 맞았던 것 같다. 모스코비치(뉴요커와 비슷한 단어, 모스크바 사람들)들의 ‘힙한 주말’보다 전국 곳곳 평범한 러시아인들의 소소한 일상이 좋았다. 그럴 때면 가만히 서서 구경하다 멀찍이 떠나갈 때쯤 흐릿한 뒷모습을 담곤 했는데, 지금도 마치 내가 아는 누군가가 돌아볼 것만 같은 사진들로 남아있다. 모쪼록 잘 지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덜컹거리던 버스에서 내리고 처음 뱉은 말은 “와, 이거 어떡하지?”였다. 실은 기사님이 선팅에 꽤나 큰 신경을 썼는지 골목길 정도를 제외하고 먼 풍경은 거의 볼 수 없었는데, 문을 열자마자 울란우데의 전경과 셀렝가 강, 우다 강을 품은 평원, 자작나무 숲이 빼곡하게 펼쳐졌다. 풍경이 펼쳐졌다니, 쏟아졌다니, ‘자연의 파노라마’니 하는 표현은 뻔한 표현이지만, 상투적이라는 말은 사실 믿고 써도 되는 스테디셀러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난 그 잘 팔리는 표현으로 그 모습을 자랑해보고 싶다. 산이 부유할 정도로 많아 부산이라는 도시에서 와서 그런지, 이런 평원의 풍경에 나는 참 약했다.
오후 5시가 다 되어 도착해서인지 사원 건물은 모두 닫혀 있거나 신도들만 입장할 수 있었다. 다행히 종교 건물은 혹여나 방해가 될까 잘 들어가지 않는 편이었어서 오히려 좋은 시간에 왔다고 생각했다. 다만 언덕 정상이라 바람이 엄청 심해서 당시 업로드한 인스타그램 스토리는 바람 소리만 녹음될 정도였는데, 이 마저도 꽤나 신비로운 힘이 느껴져서 좋았다. 내 머리는 이미 산발이었고, 다른 관광객들의 모습도 아비규환이었지만 어느 한 명 불평하지 않던 걸 보면 다들 그랬던 걸지도. 의식에 쓰는 끈과 깃발이 거세게 흔들리는 소리가 멎으면 먼 평원에서 자작나무 잎들이 잘게 사부작거리며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오길 반복할 뿐이었다. 사람의 흔적을 최소화하면 자연에서는 이런 소리가 나는구나, 울란우데와 바이칼 이후의 도시 일정들에서는 채 느끼지 못했던 질감이었다. 특별히 종교를 믿진 않지만, 여행 중에 유사한 체험을 했던 것 같은 순간들 중 하나. 내가 오롯이 홀로 존재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느껴지던, 빈 공간이지만 나 아닌 누군가가 나와 함께 있고, 나를 품어줄 것만 같은 기분을 처음 느낀 순간이었다.
적당히 둘러보고 버스 정류장에 갔더니 죽은 것처럼 흙바닥에 가지런히 누워있는 개가 있었는데, 진짜 죽은 줄 알고 놀라서 가까이 갔더니 정말 잘 자고 있었다. 이방인인 나에게도 그렇게 편한 공간이었으니 여기서 나고 자란 이 개는 어땠을까 생각해 보았다.
울란우데에서의 마지막 식사는 근사한 곳에서 하고 싶었는데, 난데없는 CASS 맥주 전광판을 보고 참을 수가 없어 'Buzza BAO'라는 식당에 들어갔다. 부자*같은 전통 음식과 햄버거를 패스트푸드처럼 함께 파는 현지 퓨전 음식점이었는데, 나름대로 트렌디한 식당인지 젊은 사람들도 많았으며 후기도 좋았다. 메뉴판의 ‘김치 부자’를 보고서 사장님께 한국 사람이라 확신했지만 아니라고 하셨다. (심지어 김치부자는 단종된 메뉴였다!)
* 부자 : 울란우데식 만두, 야채는 거의 없고 고기와 육즙으로 꽉 차있다.
배가 고픈지 꽤 되어서인지 만 원이 넘도록 이것저것 주문하고 돌아왔다. 어쩌다 보니 오늘의 첫 끼이자, 울란우데에서의 마지막 식사였으며, 예산도 꽤 넉넉했기 때문. 다행히 음식도 전부 다 맛있었다. 아니, 음식'까지' 맛있다고 하는 게 더 맞을 수도 있겠다. 첫 근교 여행을 무사히 마쳤고, 나름대로 무서운(?) 일도 있었지만 잘 해결되었으며, 음식도 좋았으니까. 모든 일이 잘 풀릴 때 오히려 걱정하는 이상한 버릇이 있음에도 ‘됐고 일단 지금은’ 너무나도 행복했다. 아마 다른 사람은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 같다. 맥주에 취해선 혼자 실실 웃고 있었고, 2-3인분은 되어 보이는 음식들을 차례차례 먹으며 감탄하고 있었으니까. “대체 시킨 메뉴가 뭐냐?”며 물어본 현지인도 있었으니, 이목을 끌긴 했던 모양.
내일이면 세 번째 도시, 이르쿠츠크가 시작된다. 기차로 8시간, 바이칼 호수를 끼고 한참을 가야 하지만 러시아 기준으론 옆 동네인 것 같았다. 다시금 이 나라의 크기에 감탄하면서, 시베리아의 파리와 바이칼과 알혼섬 후지르 마을은 어떤 곳일지 상상하며 두려움보단 설렘만으로 소화시킬 겸 밤산책을 했다. 해가 지면 무조건 숙소로 들어가야겠다던 내가 야경도 즐기는 여행자가 되어가듯, 나는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