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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ybeen Oct 05. 2023

“다시 시작할 거야.” 사연 있는 현지인과 사찰을 걷다

#6 울란우데 이볼긴스키 다짠편 : 노어노문학과 자퇴하러 가보는 러시아


나 같은 쫄보가 여행 중에 특히 끙끙 앓는 부분은 대중교통이다. 여행 내내 언제, 어디에다가, 얼마만큼의 돈을 주는지 ‘방금 탄 사람’과 ‘곧 내릴 것 같은 사람’을 뚫어져라 관찰해야 했다. 다행히 걷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러시아는 택시비가 그렇게 비싸지 않아서 대중교통을 이용한 적이 거의 없지만, 울란우데에선 상황이 달랐다. 오늘의 목적지인 시베리아 불교 사원 ‘이볼긴스키 다짠’과 ‘린포체 박샤 다짠’이 근교에 있었기 때문.


여기까지를 나의 첫 '외국 게스트하우스' 호스트였던 아나스타샤에게 열심히 설명했더니 큰 고민도 아니라는 듯 웃으며 수백 장쯤 쌓인 지도 하나를 주며 설명해 주었다. 울란우데 버스는 승합차(이른바 봉고) 크기이고, 내릴 때 돈을 내면 된다. 반쯤 걱정 해결. 그런데 내릴 때 세워달라고 크게 소리쳐야 했다. 아, 나머지 반절의 걱정이 너무 컸다. 작은 차에 벨을 다는 것도 웃기지만, 내 발음이 더 웃길 것 같았다. 그나마 아나스타샤가 써 준 러시아어를 읽을 수는 있으니 다행인 걸까? 다행히 두 사원 모두 노선의 종점에 있고, 대부분 거기서 내릴 테니 구글맵을 열심히 보다가 모두를 따라서 내리면 된다고 했다. 걱정 모두 해결!


목조 주택이 빼곡한 평원이 몇십 분 동안 이어졌다. 바다에서 나고 자란 나는 이런 풍경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boybeen
이볼긴스키 다짠 입장 티켓. 250루블이니 당시 기준으로 5,000원쯤 했다. ⓒboybeen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확실히 달랐던 건축 양식. 하지만 러시아 한복판에서 마주하니 꽤나 반가웠던 기억. ⓒboybeen


두 사원 중에선 이볼긴스키 다짠부터 도전했다. 무려 울란우데 시내의 차고지에서 출발한 버스를 종점까지 타고, (외국인 기준으로) 정말 외딴 읍내에서 마을버스로 갈아타선 또다시 종점까지 가야 하는 대장정이었지만 그럴만한 가치는 있었다. 한 시간을 넘게 평원을 달리고, 그렇게 낯선 종교의 사원에 도착했더니, 자그마치 100년이나 된 스님 미라를 볼 수 있다는 이 서사가 너무 신기했다. 사실 이 서사는 꽤나 인기가 있었는지 간혹 케이블 채널의 '믿거나 말거나'스러운 프로그램에 나오기도 하는 사연이었다는 걸 여행 다녀오고 나서 알게 되었다.


아무튼 첫 러시아 버스에 앉아 가장 먼저 한 일은 군 보급 가방에 달린 태극기를 슬쩍 주머니에 넣는 것이었다. 나는 누가 봐도 외국인이겠지만, 특히 꽤 많은 러시아인들이 "한국인들은 모두 2018년 기준 최고 유행이었던 '투블럭펌'을 하고 다닌다"며 머리만 보고도 국적을 맞추기도 했지만, 굳이 나서서 들키고 싶진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현지인들로 꽉 찼다. 이 봉고에 대체 몇 명까지 탈 수 있는지 시험이라도 하는 듯 잘 웃지 않는 사람들이 더욱 불편해 보이는 표정으로 서 있었고, 나는 얌전히 가방을 끌어안은 채 창밖을 보고 있었다. 낯선 풍경이 지나가고 있었다. 짙은 선팅으로 색을 잃은 건조한 평원이 펼쳐졌고, 낡은 목조 건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선 마을이 끝도 없이 지나갔다. 바다에서 나고 자란 나와는 다른 삶을 살아갈 초원의 사람과 삶을 마주했던 경험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내 어깨를 살짝 쳤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검은색 가죽자켓을 입은 아시아계 여자분이었다. “한국에서?” 반갑다기보단 의심스러웠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고, 주말 오후에 사원을 간다기엔 너무 독특한 옷차림이었기도 했기 때문. 그것보다 내가 한국인인 것은 어떻게 알았을까. 카톡이라도 올까 봐 일부러 무음으로 설정한 폰을 꼭 쥐고 있었는데, 알 길이 없었다. 역시 또 내 투블럭펌 때문인가 생각했더니 소매에 태극기가 그려진 PX산 NEPA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는 건 그날 밤에서야 깨달았다.


돌릴 때마다 불경을 외우는 것과 같다고 해서 나도 천천히 몇 번 돌려보았다. 무언가 바라는 것을 생각해야 할지, 오히려 비울 것을 생각해야 할지 고민했었다. ⓒboybeen
설탕, 쌀, 동전이 북 아래에 놓여 있었다. 아마 약간의 성의를 표하기 위함이 아닐까. ⓒboybeen


종점에 내리자마자 “다짠, 여기로”라며 나에게 따라오라고 했다. 내 마을버스비까지 같이 지불하시곤 또다시 씨크하게 “앉아”라고 하셔서 얌전히 앉았다. 여행지에서 이유 없는 호의는 마냥 즐겁지 않다. 특히나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의 호의는 더더욱 경계해야 하는 게 사실이고. 잔뜩이나 겁을 먹고 있었는데, 내 걱정을 아득히 넘는 일이 이어지니 더 불안해지는 마음이 반, 이렇게 된 이상 모르겠다는 마음이 반이었다. 갈아탄 버스는 이제는 읍내도 벗어났다는 걸 증명하듯 포장이 꽤나 벗겨진 초원 사이의 도로를 덜컹거렸고, 약간을 달려 이볼긴스키 다짠에 도착했다.


얼떨결에 나는 그 분과 사찰을 걷고 있었다. 꽤 큰 사찰을 반쯤 돌 때까지 별 소득 없는 대화만 한국어와 러시아어를 섞어가며 이어가다가 어쩌다 한국말을 배우게 되었는지 물어봤다. “다 끝내고 다시 시작할 거야” 예상했던 대답과 너무 달랐다. 하지만 대답하며 벗은 선글라스 뒤 처음 본 그분의 눈빛이 너무 무거웠다. 이전에 한국에 오셨다던 그분은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한 식당에 잠시 정착했다고 했다. 어땠냐고 물어보니 나쁜 사람들도 많았지만 음식도 괜찮았고, 아무튼 여기보단 나으니 어서 떠나고 싶다는 말만 반복했다. 여기도 좋지 않냐며 넉살을 부렸지만 단호하게 대답했다. “조심해. 여긴 나쁜 사람 더 많아. 떠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곧 헤어졌다. 그분은 딱 한 바퀴를 돌아보시곤  “안녕”하며 선글라스를 다시 끼고 가셨고, 나는 꾸벅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도 이 초원의 공기만큼이나 무미건조했다. 이전에 부전공으로 관광학원론을 수강하며 관광객은 좋은 면만 보고 떠나는 것일 뿐인 건 아닐지에 대한 성찰이 커져가며 점차 사회참여형 관광이 늘어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역시도 현지인 개개인의 삶과 아픈 사연과는 별개일 터. 이방인으로서의 한계에 대해 잠시 생각하며 내 몫의 여행을 이어가기로 했다. 이름도 듣지 못한 그 사람에게 마을버스비만큼의 빚을 지고서, 한국에서의 새 삶은 행복하길 바라보았다.


시베리아 불교의 중심지인 이곳은 확실히 이색적이었다. 돌리면 기도를 한 것과 같다던 북들과 알록달록하거나 하얀 조형물들이 낯설었지만, 은근히 다른 것 같지만 또 비슷한 동양적인 건축양식은 익숙했다. 앞서 언급했던 이볼긴스키 다짠에서의 목적이었던 스님미라는 자세히 묘사하진 않겠으나, 고생해서 찾아올 만큼의 깊은 미소는 볼 수 있었다. 1927년 가부좌상을 하고 명상하던 중 돌아가신 스님의 유해를 2002년에 꺼냈더니 전혀 부패되지 않았다는 이야기. 그러한 ‘기적’을 확인하기 위해 찾아온 전 세계의 신자와 관광객 사이에서 조금은 다른 이야기를 마주하며 '이것도 여행이고, 이래서 여행인가' 생각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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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박 34일,

11개의 도시와 바이칼호수까지!

10,000Km를 넘게 달렸던

2018년 스물셋 여름날의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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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프롤로그 : 좋아할 수 있는 일만 하며 살아가고 싶은데, 전공자도 전공자라서 러시아는 무서워요

02 동해항 : 배 타고 러시아 가는 건 영화에서나 봤지

03 블라디보스토크 1편 : 반가움에 '끝내주는 가게'를 소개해주겠다는 술 취한 현지인

04 블라디보스토크 2편 : 잘못 부른 택시가 폭우 속에 20분을 기다리다

05 울란우데 도시편 : 전 세계에서 가장 큰 42톤 짜리 레닌 두상이 있는 도시

06 울란우데 이볼긴스키 다짠편 : “다 끝내고 다시 시작할거야.” 사연 있는 현지인과 사찰을 걷다

07 울란우데 린포체 박샤 다짠편 : 부산(釜山) 사람은 평원에 약해

08 바이칼 호수 알혼섬 후지르마을 입성편 : 편도 6시간, 알 사람은 안다는 호수의 섬

09 바이칼 호수 북부 투어편 : 바다가 없으면 답답하다는 아버지를 호수에서 이해하다

10 바이칼 호수 알혼섬 카약 대장정 1편 : 수영은 못 해도 무작정 IN THE BAIKAL

11 바이칼 호수 알혼섬 카약 대장정 2편 : 카약도, 인생도 뒤집어지기는 쉽지 않아

12 이르쿠츠크 1편 : 유배자들이 일군 시베리아의 파리에서 좋은 학생으로 인정받다

13 이르쿠츠크 2편 : 유노스찌(젊음)섬, 청춘은 그 자체로 노 프라블럼

14 시베리아 횡단열차 : 러시아 군인 앞에서 꺼낸 K-POP이 왜 하필 ‘이등병의 편지’였을까

15 노보시비르스크 : ‘노잼도시’에도 사람은 산다, 그래서 재밌다

16 예카테린부르크 1편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서 마이클 잭슨을 기념하다

17 예카테린부르크 2편 : 치킨텐더를 시켜서 닭날개를 받아도 맛있는 게 여행이다

18 카잔 1편 : 자퇴한다더니 교환학생의 도시를 예습해도 되는 걸까

19 카잔 2편 : 정교회 성당 옆 이슬람 사원에서 느껴보는 연방국의 넓이

20 니즈니노브고라드 : 러시아에서 조국을 수호한 날에 한국 예비군으로서 축하를 받은 사연

21 황금고리 1편 블라디미르 : 으슥한 식당 한 구석 오크통에서 꺼낸 꿀술, 메도부하

22 황금고리 2편 수즈달 : 1,000년 전 방어요새도 이제는 선베드 명당

23 모스크바 1편 : 러시아어 전공자면 성 바실리 성당 앞에서 울어도 주책은 아니지?

24 모스크바 2편 : 모스크바의 871번째 생일, “오늘 모스크바는 잠들지 않습니다.”

25 모스크바 3편 : 지방 사람은 서울 한 번도 결심이 필요한데, 모스크바는 어떻겠어

26 모스크바 4편 : DIY가 취미가 아니라면 마트료시카는 꼭 열어보자

27 상트페테르부르크 1편 :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28 상트페테르부르크 2편 : 책을 산 게 죄고, 읽는 게 벌이라던 <죄와 벌> 따라 ‘도망’가기

29 상트페테르부르크 3편 : 비행기 시간 남았으면 투어 시켜줄게, 마지막 택시기사님의 호의

30 에필로그 : 스물셋의 나름 괜찮았던 한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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