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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ybeen Feb 05. 2024

부산(釜山) 사람은 평원에 약해

#7 울란우데 린포체 박샤 다짠편 : 노어노문학과 자퇴하러 가보는 러시아


이볼긴스키 다짠을 한 바퀴쯤 더 둘러보고 울란우데로 돌아왔다. 처음이 어렵지 돌아오는 건 쉬웠다. 하지만 그것조차 나름 큰 모험이었는지 소비에트 광장에 도착해 레닌 두상과 눈이 마주치니 반갑기까지 했다. 배가 살짝 고팠지만 해가 지기 전에 일정을 마치고 싶어 서둘러 린포체 박샤 다짠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더니, 직행 노선은 아닌 듯 울란우데 도심 구석구석까지 볼 수 있었다. 애매하게 포장된 도로는 모랫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맑고 건조한 공기가 이들에게도 상쾌했던지 여전히 무표정한 사람들도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감천문화마을, 산복도로와 비슷한 분위기의 높은 언덕으로 오르기 시작하자 목조 건물들이 빼곡히 지나갔다. 도심과는 다른 분위기, 어쩌면 진짜 울란우데일 수 있는 풍경들이었다. 꼬질꼬질한 동네길엔 꽃을 한가득 안고 어딘가로 돌아가는 아주머니, 그 아주머니의 손을 잡고 돌멩이를 걷어차며 걸어가는 어린아이, 모자(母子)를 지켜보는 노부부가 있었다. 혼자서도 산책을 잘 다니는듯한 동네 개들은 털레털레 걸어가다 애교를 부리곤 간식을 얻어먹거나, 철퍼덕 엎어져서는 차든 사람이든 상관없다는 듯 자고 있었다.


꼬질꼬질한 동네 강아지들이 많았다. 덩치는 커도 순한 친구들. ⓒboybeen


'이런 순간들이 내가 기대했던 진짜 러시아의 일상인 걸까' 생각이 드니 괜히 기분이 좋아졌는데, 여행을 마친 지금 생각해 보니 맞았던 것 같다. 모스코비치(뉴요커와 비슷한 단어, 모스크바 사람들)들의 ‘힙한 주말’보다 전국 곳곳 평범한 러시아인들의 소소한 일상이 좋았다. 그럴 때면 가만히 서서 구경하다 멀찍이 떠나갈 때쯤 흐릿한 뒷모습을 담곤 했는데, 지금도 마치 내가 아는 누군가가 돌아볼 것만 같은 사진들로 남아있다. 모쪼록 잘 지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린포체 박샤 다짠 입구. 이런 배경에, 이런 꽃밭이, 이런 건물이 서 있는 풍경이 또 있을까? ⓒboybeen
린포챠 박샤 다짠이라고 적힌 현판. 초보 여행자라 현판을 볼 때마다 잘 찾아온 게 신기했다. ⓒboybeen 


덜컹거리던 버스에서 내리고 처음 뱉은 말은 “와, 이거 어떡하지?”였다. 실은 기사님이 선팅에 꽤나 큰 신경을 썼는지 골목길 정도를 제외하고 먼 풍경은 거의 볼 수 없었는데, 문을 열자마자 울란우데의 전경과 셀렝가 강, 우다 강을 품은 평원, 자작나무 숲이 빼곡하게 펼쳐졌다. 풍경이 펼쳐졌다니, 쏟아졌다니, ‘자연의 파노라마’니 하는 표현은 뻔한 표현이지만, 상투적이라는 말은 사실 믿고 써도 되는 스테디셀러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난 그 잘 팔리는 표현으로 그 모습을 자랑해보고 싶다. 산이 부유할 정도로 많아 부산이라는 도시에서 와서 그런지, 이런 평원의 풍경에 나는 참 약했다.


의식에 사용하는 천들. 가까이 가면 바람소리와 함께 천이 거칠게 스치는 소리가 들린다. ⓒboybeen
린포체 박샤 다짠 뒤로 넓은 평원과 셀렝가 강이 펼쳐졌다. 옛사람들은 어떤 이야기를 쓰고 싶었을까. ⓒboybeen


오후 5시가 다 되어 도착해서인지 사원 건물은 모두 닫혀 있거나 신도들만 입장할 수 있었다. 다행히 종교 건물은 혹여나 방해가 될까 잘 들어가지 않는 편이었어서 오히려 좋은 시간에 왔다고 생각했다. 다만 언덕 정상이라 바람이 엄청 심해서 당시 업로드한 인스타그램 스토리는 바람 소리만 녹음될 정도였는데, 이 마저도 꽤나 신비로운 힘이 느껴져서 좋았다. 내 머리는 이미 산발이었고, 다른 관광객들의 모습도 아비규환이었지만 어느 한 명 불평하지 않던 걸 보면 다들 그랬던 걸지도. 의식에 쓰는 끈과 깃발이 거세게 흔들리는 소리가 멎으면 먼 평원에서 자작나무 잎들이 잘게 사부작거리며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오길 반복할 뿐이었다. 사람의 흔적을 최소화하면 자연에서는 이런 소리가 나는구나, 울란우데와 바이칼 이후의 도시 일정들에서는 채 느끼지 못했던 질감이었다. 특별히 종교를 믿진 않지만, 여행 중에 유사한 체험을 했던 것 같은 순간들 중 하나. 내가 오롯이 홀로 존재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느껴지던, 빈 공간이지만 나 아닌 누군가가 나와 함께 있고, 나를 품어줄 것만 같은 기분을 처음 느낀 순간이었다.


다짠 앞에서 자고 있던 개. 덩치도 꽤 컸는데 정말 죽은 것처럼 자고 있었다. ⓒboybeen


적당히 둘러보고 버스 정류장에 갔더니 죽은 것처럼 흙바닥에 가지런히 누워있는 개가 있었는데, 진짜 죽은 줄 알고 놀라서 가까이 갔더니 정말 잘 자고 있었다. 이방인인 나에게도 그렇게 편한 공간이었으니 여기서 나고 자란 이 개는 어땠을까 생각해 보았다.

 

울란우데에서의 마지막 식사는 근사한 곳에서 하고 싶었는데, 난데없는 CASS 맥주 전광판을 보고 참을 수가 없어 'Buzza BAO'라는 식당에 들어갔다. 부자*같은 전통 음식과 햄버거를 패스트푸드처럼 함께 파는 현지 퓨전 음식점이었는데, 나름대로 트렌디한 식당인지 젊은 사람들도 많았으며 후기도 좋았다. 메뉴판의 ‘김치 부자’를 보고서 사장님께 한국 사람이라 확신했지만 아니라고 하셨다. (심지어 김치부자는 단종된 메뉴였다!)

* 부자 : 울란우데식 만두, 야채는 거의 없고 고기와 육즙으로 꽉 차있다.


배가 고픈지 꽤 되어서인지 만 원이 넘도록 이것저것 주문하고 돌아왔다. 어쩌다 보니 오늘의 첫 끼이자, 울란우데에서의 마지막 식사였으며, 예산도 꽤 넉넉했기 때문. 다행히 음식도 전부 다 맛있었다. 아니, 음식'까지' 맛있다고 하는 게 더 맞을 수도 있겠다. 첫 근교 여행을 무사히 마쳤고, 나름대로 무서운(?) 일도 있었지만 잘 해결되었으며, 음식도 좋았으니까. 모든 일이 잘 풀릴 때 오히려 걱정하는 이상한 버릇이 있음에도 ‘됐고 일단 지금은’ 너무나도 행복했다. 아마 다른 사람은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 같다. 맥주에 취해선 혼자 실실 웃고 있었고, 2-3인분은 되어 보이는 음식들을 차례차례 먹으며 감탄하고 있었으니까. “대체 시킨 메뉴가 뭐냐?”며 물어본 현지인도 있었으니, 이목을 끌긴 했던 모양.

  

내일이면 세 번째 도시, 이르쿠츠크가 시작된다. 기차로 8시간, 바이칼 호수를 끼고 한참을 가야 하지만 러시아 기준으론 옆 동네인 것 같았다. 다시금 이 나라의 크기에 감탄하면서, 시베리아의 파리와 바이칼과 알혼섬 후지르 마을은 어떤 곳일지 상상하며 두려움보단 설렘만으로 소화시킬 겸 밤산책을 했다. 해가 지면 무조건 숙소로 들어가야겠다던 내가 야경도 즐기는 여행자가 되어가듯, 나는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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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박 34일,

11개의 도시와 바이칼호수까지!

10,000Km를 넘게 달렸던

2018년 스물셋 여름날의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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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프롤로그 : 좋아할 수 있는 일만 하며 살아가고 싶은데, 전공자도 전공자라서 러시아는 무서워요

02 동해항 : 배 타고 러시아 가는 건 영화에서나 봤지

03 블라디보스토크 1편 : 반가움에 '끝내주는 가게'를 소개해주겠다는 술 취한 현지인

04 블라디보스토크 2편 : 잘못 부른 택시가 폭우 속에 20분을 기다리다

05 울란우데 도시편 : 전 세계에서 가장 큰 42톤 짜리 레닌 두상이 있는 도시

06 울란우데 이볼긴스키 다짠편 : “다 끝내고 다시 시작할거야.” 사연 있는 현지인과 사찰을 걷다

07 울란우데 린포체 박샤 다짠편 : 부산(釜山) 사람은 평원에 약해

08 바이칼 호수 알혼섬 후지르마을 입성편 : 편도 6시간, 알 사람은 안다는 호수의 섬

09 바이칼 호수 북부 투어편 : 바다가 없으면 답답하다는 아버지를 호수에서 이해하다

10 바이칼 호수 알혼섬 카약 대장정 1편 : 수영은 못 해도 무작정 IN THE BAIKAL

11 바이칼 호수 알혼섬 카약 대장정 2편 : 카약도, 인생도 뒤집어지기는 쉽지 않아

12 이르쿠츠크 1편 : 유배자들이 일군 시베리아의 파리에서 좋은 학생으로 인정받다

13 이르쿠츠크 2편 : 유노스찌(젊음)섬, 청춘은 그 자체로 노 프라블럼

14 시베리아 횡단열차 : 러시아 군인 앞에서 꺼낸 K-POP이 왜 하필 ‘이등병의 편지’였을까

15 노보시비르스크 : ‘노잼도시’에도 사람은 산다, 그래서 재밌다

16 예카테린부르크 1편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서 마이클 잭슨을 기념하다

17 예카테린부르크 2편 : 치킨텐더를 시켜서 닭날개를 받아도 맛있는 게 여행이다

18 카잔 1편 : 자퇴한다더니 교환학생의 도시를 예습해도 되는 걸까

19 카잔 2편 : 정교회 성당 옆 이슬람 사원에서 느껴보는 연방국의 넓이

20 니즈니노브고라드 : 러시아에서 조국을 수호한 날에 한국 예비군으로서 축하를 받은 사연

21 황금고리 1편 블라디미르 : 으슥한 식당 한 구석 오크통에서 꺼낸 꿀술, 메도부하

22 황금고리 2편 수즈달 : 1,000년 전 방어요새도 이제는 선베드 명당

23 모스크바 1편 : 러시아어 전공자면 성 바실리 성당 앞에서 울어도 주책은 아니지?

24 모스크바 2편 : 모스크바의 871번째 생일, “오늘 모스크바는 잠들지 않습니다.”

25 모스크바 3편 : 지방 사람은 서울 한 번도 결심이 필요한데, 모스크바는 어떻겠어

26 모스크바 4편 : DIY가 취미가 아니라면 마트료시카는 꼭 열어보자

27 상트페테르부르크 1편 :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28 상트페테르부르크 2편 : 책을 산 게 죄고, 읽는 게 벌이라던 <죄와 벌> 따라 ‘도망’가기

29 상트페테르부르크 3편 : 비행기 시간 남았으면 투어 시켜줄게, 마지막 택시기사님의 호의

30 에필로그 : 스물셋의 나름 괜찮았던 한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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