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울란우데 도시편 : 노어노문학과 자퇴하러 직접 가보는 러시아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의 가장 큰 장점을 묻는다면 ‘잘 자고, 잘 먹고, 잘 일어날 수 있어서’라고 답하고 싶다. 와이파이는커녕 기차역 근처가 아니면 데이터 자체가 안 터지기 때문에, 아주 좋은 핑계로 세상과 나의 싱크를 잠시 꺼둘 수 있다는 건 현대인으로서 정말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렇게 되니 할 수 있는 일은 몇 시간째 나오는 들판 구경하기, 뛰어다니는 아이들 놀아주기, 말은 잘 통하지 않지만 심심해 보이는 러시아인과 대화하기, 혹은 탑승 전 봉지를 꽉 채워 샀던 과자를 끝도 없이 먹기 정도가 있었으니, '아무것도 안 되면 시간이 너무 안 갈 것 같은데'하는 우려와 달리 꽤나 바쁜 기차 생활을 보냈다. 지금까지의 나는 '어딘가에서 무언갈 하고 있는 나'로 정의되어 왔던 것 같은데, 그런 걸 걷어내니 '그냥 나'가 남았다. 방학하면, 졸업하면, 퇴사하면, 휴가 내면, 그렇게 잠시 어딘가로부터 가까스로 벗어나면 자유를 만끽하겠다는 다짐들을 일평생 하며 살아갈 것 같은데, 이게 기차 한 번 탔다고 해결되는 건 어떤 의미에서는 참 허무하고 덧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냥 나'로서 특히 좋았던 건 잠에 들고, 깨는 순간들이었다. 밤기차에 불이 꺼지면 창밖의 들판은 달빛을 받아 꽤나 밝게 반짝였고, '이제 스물 세 살인 나는 대체 어쩌다 이 큰 유라시아 대륙의 어딘가로 향하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며 잠에 들었다. 그러다 매일 아침 햇빛으로 객차가 꽉 차고, 이미 다른 승객들은 브런치까지 다 드신 시간대쯤에야 나지막이 일어났다. 앞자리 아주머니는 레몬(댁에서 썰어 오신 듯 봉지에 항상 들어있다)을 홍차에 넣고 저으며 "도브라예 우뜨라(좋은 아침)"하며 인사해주곤 했었다. 나는 머쓱하게 웃으면서 베개피 밑에 넣어둔 여권, 지갑, 휴대폰이 잘 있는 것까지 확인하고서 비몽사몽 양치를 하러 갔다. 8월 18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꼬박 ‘2 days 17 hours’를 거쳐 울란우데에 도착했던 날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일정 중 최장기 노선이고, 첫 다인실(플라츠카르타) 탑승이라 걱정이 많았다. 게다가 첫 번째 도시였던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여행이 뜻대로 풀리지 않았던지라 실은 꽤나 의기소침했었는데, 횡단열차에서는 ‘에이, 나한텐 그렇게 좋은 에피소드는 안 생길 거야’라고 넘겨버릴 법한 남들의 뻔한 여행기처럼 좋은 일들만 가득했다. 내가 조금 덜 서툴렀다면 더 나누고, 더 즐길 수 있었을 것 같은 아쉬움이 남을 정도였지만, 다음엔 더 멋진 사람이 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가져보기로 했다. 혼자 온 나를 도와준 한국교통대학교 교통대장정 단원들과 함께 인스타그램에 영상을 올리고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멀찍이 육교 위에서 본 플랫폼엔 함께 했던 사람들이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쉬고 있었다. 나는 또다시 혼자가 되었지만, 모두들 각자의 일정도 잘 마무리하길 바라며 잠시 바람을 쐬었다. 극심한 대륙성 기후라던 가이드북의 문구가 이해되는 쾌적한 날씨였다. 석탄이 실린 때 묻은 열차들과 건조한 풍경이 낯설고 퍽 삭막하기도 했지만, 육교엔 집 나간 고양이를 찾는다는 전단지가 펄럭이고 있었다.
울란우데 역에서 약 십 여 분을 걸어 내 인생의 첫 ‘외국인이 운영하는 진짜 외국 호스텔’에 도착했다. 외국 호스텔이 으레 그렇듯 '빼애액'하는 초인종을 누른 후 깔리면 죽을 것 같은 무겁고 무서운 철문을 열고, 아주 작은 창문으로 빛이 새어 나오는 어두운 계단을 올랐다. 처음 본 장면은 호스트(으로 보이는)의 볼에 뽀뽀를 하며, 너무 고맙다는 프랑스어(로 들리는)를 높고 큰 목소리로 전하는 백인 여자분이었다. 그분은 나보다도 큰 배낭을 메고서 나에게도 밝은 목소리로 'HI!' 하곤 나가셨다. 나도 어색하게 몇몇 생활수칙들을 영어 듣기 풀듯 새겨듣고선, 벽면에 빼곡한 여행자들의 후기 속에 있던 한국어 몇 문장에 반가워하다 밖으로 나왔다.
울란우데는 바이칼 호수의 오른쪽에 있는 도시이다. 몽골 제국의 일원이었던 부랴트 민족들이 살아가고 있어서, '나 정도면 나름 정말 한국인 같이 생겼다'라고 생각했던 내게 길을 물어본 할머니가 계셨을 정도로 우리와 닮은 사람들이 많았다. 지금은 유라시아를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꽤나 중요한 지점인데, 베이징까지 이어지는 몽골종단철도(TMGR)와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시베리아횡단철도(TSR)가 만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나처럼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는 사람도, 반대로 유럽에서 동아시아로 오는 사람도 이곳에서 만나게 된다.
내가 울란우데를 일정에 넣은 목적은 시베리아 불교 사원인 ‘다짠’과 세계에서 가장 큰 레닌 두상이었다. 둘 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종교라 함은 자고로 성 바실리 성당처럼 으리으리한 정교회를 생각하게 되지만, 러시아는 전 세계에서 가장 국토가 넓은 나라이자 연방국이기 때문에 아주 다양한 인종, 문화, 종교가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다. 시베리아 불교도 그 일환인데, 우리와 같은 동아시아 불교와는 비슷한 듯 꽤나 다른 모습이 신기해서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실제로 마주한 레닌 두상은 내 예상보다 훨씬 컸고, 진짜 컸다. 약 8m에 42톤이라니 그럴 수밖에. 심지어 흉상이라거나, 전신상이 아닌 두상이기 때문에 정말 만에 하나 굴러 떨어지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까지 들 정도였다, 호스텔 벽면에는 ‘레닌 두상과 장난스런 사진을 찍어도 될까요?’의 답변이 길게, 그것도 꽤나 독창적인 예시들과 함께 적혀 있기도 했다. 인물도 인물이지만, 심지어 그 공간이 ‘소비에트 광장’이라 많이들 걱정하긴 했나 보다.
부랴트 국립 극장이 보이는 식당에서 울란우데를 대표하는 음식인 ‘부자’를 먹었다. 부자는 부랴티아어로 만두라는 뜻인데, 야채는 일절 없이 고기로 꽉 차 있어 평원에서의 삶은 이런 느낌이겠거니 상상하게 되는 맛이었다. 그 식당에서 한 달 간 유용하게 써먹은 수법이 탄생했다. 역으로 메뉴를 묻는 것. 다양한 부자가 있었지만 솔직히는 해석이 힘들었고, 영어 메뉴판도 없었으니 "제일 맛있는 게 어떤 거예요?"라고 물었다. 대답 역시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것 참 좋은 대답이라는 표정으로 뻔뻔하게 "그럼 그걸로 주세요!"라고 답하곤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자리로 돌아왔다. 민망하지만 실패한 적은 없었는데, 이 역시 나만의 여행 템포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잘 먹으니 기분도 좋아졌는지 읽지 못했던 분위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 도시는 너무 평화로웠다. 공원에선 늦은 밤까지도 분수대를 따라 아이들이 뛰어다녔고, 부랴트-아르바트 거리엔 ‘열심히 연습하며 주말만 기다린 듯 한' 버스킹이 곳곳에서 이어졌다. 이번 여행이 아니면 다시 오기도 힘든 도시라는 생각에 마음이 조금 급해졌던 것도 사실이지만, 블라디보스토크와 달리 여행객이 거의 없어 현지인 사이에 섞여 있다 보니 나도 일상의 편안함을 나눠 받는 기분이었다.
나름대로 기대했던 갤럭시 쇼핑센터엔 볼 게 없었지만, 그 마저도 정겨워서 좋았다. 이상할 정도로 다 좋았다. 이젠 여차해도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설레서 그런 걸까? 아니면 나만 빼놓고 즐거운 것 같은 관광객들이 안 보여서? 여하튼 좋은 건 좋은 거니까 어디를 가도 폴짝거리던 울란우데의 아이들처럼 큰 생각 없이 이 도시를, 내 여행을 즐기기로 했다. 못 해본 거 해보자는 마음으로 러시아에서의 첫 서브웨이에도 도전했다. 한국에서도 서브웨이 주문은 어렵기로 유명한데, 러시아어로 하려니 쉽진 않았지만 사람이 참 웃기게도 그새 적응한 듯 잘 주문했다. 대륙과 들판에서 커서인지 채소는 덩치가 엄청났고, 함께 주문한 '서양배맛 환타'는 낮에 먹은 '오이맛 스프라이트'보다는 나았지만 신기한 맛이었다. 으스댈 수 있을 정도로 특별한 일은 없지만, 평화롭게 나만의 템포를 찾아가는 여행. 그렇게 나는 조금씩 여행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숙소엔 한국사람, 아니 동양인도 한 명 없었다. 이 상황, 낯설지만 꿀릴 건 없었다. 누가 물어보면 이 숙소에서 만큼은 내가 한국 대표라는 자부심만 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