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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ybeen Apr 28. 2024

러시아 군인 앞에서 꺼낸 K-POP이 왜 하필이면

#14 시베리아 횡단열차 : 노어노문학과 자퇴하러 가보는 러시아

열차의 밤이 아직도 떠오른다. 옅은 미색 등의 따스함, 기분 좋은 덜컹거림, 얇지만 포근한 침구까지도. ⓒboybeen


나는 겁이 많다. 키라도 컸다면 덩칫값 못한다고 욕먹을 수준으로 쫄보라서, 어쩌면 덩칫값을 잘하고 있는 걸 수도 있겠다. 특히 첫 해외 배낭여행이었던지라 항상 여러모로 경계가 심했는데, 네 번째 도시인 노보시비르스크행 횡단열차를 타기 위해 한 밤 중에 이르쿠츠크역에 도착했을 때에도 그러했다.


웬만하면 기차역 앞은 번화가니까 건물이 많든 주변이 밝은 게 정상이다. 그런데 이르쿠츠크역은 뭔가 이상했다. 음산한 조명이 앙가라강의 밤안개에 부딪혀 흩어지고 있었고(강 옆이니까 당연함), 역 앞에는 그 무섭다던 러시아 10대 남자애들이 옹기종기 모여 피우던 담배 냄새가 가라앉아 있었다(10대가 아닐 수도 있음). 택시기사들은 초점 잃은 눈으로 바가지 씌울 여행객들을 찾고 있었으니(이건 상상이 맞음), 어서 역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무언가 큰일이 생길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사실 지금 생각하면 아무도 나를 위협하지 않았고, 모두가 일상을 보내는 것뿐이었을 수도 있는데 나는 쫄아 있었다.


현지인 3명과 2등석을 같이 타니 굉장히 전문적이었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 말하라며, 충전은 안 필요하냐던 따뜻한 사람들. ⓒboybeen
열차 비용에 포함되었던 기내식. 오른쪽 위의 길쭉한 토마토는 한 할머니께서 직접 키우신 거라며 나눠주셨다. ⓒboybeen
2등석 복도에 비친 노을. 열차여행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들 중 하나는 이런 따스한 풍경이다. ⓒboybeen


열차가 도착했다는 방송을 듣고 플랫폼으로 나섰는데, 내 칸(러시아어로는 바곤)이 없었다! 초대받지도 않았는데 눈치 없이 온 사람처럼 멀뚱멀뚱 서있었는데, 저 멀리서 무려 6개 칸이 오더니 꽝! 하고 붙어버렸다. 이 상황이 나만 신기한 걸까?라고 생각하며 돌아보니 러시아인들도 모두 소소하게 박수를 치고 있었다. 나도 조용히 짝짝.


사실 노보시비르스크까지는 경험 삼아 3등석 대신 2등석 2층 티켓을 끊었는데, 가방을 3층 짐칸으로 올리는 것도 문제였고 모르는 사람들과 ‘안에서 잠기는’ 방 하나를 써야 한다는 점에서 걱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혹시라도 밀폐된 공간에서 이상한 사람을 만나면 정말 큰일이니까. 그런데 신기하게 우리 칸에는 나밖에 없었고, 기차가 덜컹거리고 나도 정리를 어느 정도 마친 1시간쯤 후에 젊고 마른 러시아 남자가 한 명이 큰 짐을 들고 탔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빠르게 진도를 나가서(?)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는 블라디슬라프와 만난 순간.


임관한 후 1년 만에 첫 휴가를 명 받았다고 소개한 블라디슬라프는 나를 만나자마자 아주 격하게 반가워했고, 각종 간식을 건네며 본인의 전화번호까지 내 폰에 정성스레 찍어주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수료식 사진(늠름하게 정복을 입고 있었다)과 가족사진, 마라톤 대회에서 은메달 따고 찍은 기념사진 등등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둘이서 사진도 찍고, 나도 엽서를 주었으니 정말 진도가 빨랐다.


 비행기보다는 철도가 저렴하기도 하고, 일정 상 여유가 있는 분들이 타시다 보니 일상을 함께 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좋았다. ⓒboybeen
정차역마다 이런 작은 매점들이 있다. 물건마다 가격표를 붙여두어서 주문하기는 쉬운데, 밖에 있는 슈퍼보다는 아무래도 비싸다. ⓒboybeen
3등석의 풍경. 개방적인 구조여서 오히려 풍경 보는 재미도 크고, 안전하기도 했다. ⓒboybeen


짧은 러시아어로 힘겹게 한국에서 왔다고 소개하니 자기 이름을 한국어로 적어달라고 했는데, 마땅한 펜이 없자 차장한테 직접 뛰어가서 가져오기까지 했다. 이 모든 과정이 15분 정도 걸렸으니 실행력 하나는 굉장한 사람이었던 것. 이렇게 텐션이 높은 러시아인은 처음 만나봐서 순수한 모습이 귀엽기도, 고맙기도 했다.


전날 꽤나 고된 일정으로 다녔던지라 웬만하면 깨지 않을 심산으로 잠에 들었는데, 아침에 열차 직원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나를 깨웠다. 치킨이랑 생선 중에서 고르라는 뜬금없는 질문에 무슨 상황인고 하니 대충 넘긴 기내식 안내가 떠올랐다. 잠에 들 때까지 비어 있었던 맞은편 칸에는 3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부부가 타고 있었는데,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혼이 나고 있는(?) 나를 보고 무언가 먹는 연기를 엄청 열심히 해주셨다. 이렇게까지 모두가 함께 물어보길래 '강매당하는 건 아니겠지' 하면서도 치킨으로 요청드렸는데, 알고 보니 무료에다가 양도, 맛도 꽤 괜찮아서 만족스러웠다.


핑크색 노을로 물들었던 어느 정차역의 모습. 정차 시간이 길어서 역도 구경하고, 육교도 올라갔던 기억이 있다.  ⓒboybeen
열차 여행이 지겹지 않았냐는 질문에는 몇 시간 동안 풍경이 바뀌니 오히려 바빴다고 대답하곤 한다. ⓒboybeen


아까 기내식을 몸으로 열심히 설명해 준 부부의 이름은 니콜라이와 스베틀라나였다. 아침 댓바람부터 혼나고 있었던 덕에 나를 상당히 흥미롭게 쳐다보다가 나를 도와주시며 인사를 나누게 되었는데, 남편인 니콜라이는 블라디슬라프보다는 계급이 높아 보이는 러시아군 장교였다. 여행을 다녔던 2018년 당시 횡단열차에서 잘생긴 군인과 친해졌다는 내용의 영상이 유튜브에서 아주 화제였는데, 나도 그런 트렌드에 걸맞은 경험을 하고 있었던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그 달달하던 유튜브 영상들과는 느낌이 정말 많이 달랐다. 세 분 모두 국제적인 이슈에 대한 관심이 아주 많으셨기 때문. 압박면접받는 기분으로 처참한 러시아어와 영어, 손짓과 발짓을 모두 활용하여 질문들을 쳐내기(?) 시작했는데.. 평창 올림픽을 잘 봤다는 대화는(러시아 국적으로 참가할 수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개방적이셨다) 북한과의 관계, 탄핵 정국 이후의 사회적 변화에 대한 이야기까지 흘러가버렸다. 물론 이 모든 이야기는 서로의 아주 짧은 영어와 러시아어로, 1:3으로 이루어졌으니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던 순간.



식은땀이 흐를 지경이 되자, 내가 너무 긴장해 보였는지 한국에서 유명한 노래를 불러달라고 하셨다. 그런데 차마 블랙핑크의 불장난 같은 걸 부를 수도 없고 해서 뭐라도 틀어드리려 폰을 켰는데, 하필이면 내 폰에 가득하던 몇 곡의 K-POP을 제외하면 인디밴드와 80-90년대 노래들 밖에 없었으니 이 상황에선 실로 극단적인 선택지였다. 그러다 한국도 징병제라서 입대를 앞둔 심경을 표현하는 노래가 있다며 ‘이등병의 편지’를 들려 드리며, 매우 엉성한 러시아어로라도 가사를 해석해 드리니 무슨 느낌인지 아시겠다며 웃으셨다.


이상하고, 또 신기한 밤이었다. 주황색 등이 켜진 시베리아 횡단열차 2등석, 4인실에는 한국인 대학생과 러시아인 셋이 타고 있었다. 우리 넷은 그렇게 꿀렁꿀렁하는 밤기차를 타고 김광석의 옛 노래를 들으며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고, 아주 짙은 어둠으로 덮인 바깥엔 간혹 무언가 달빛에 반짝였다. 어쩌면 일평생 한 번도 스쳐가지 않았을 사람들, 지금이 지나면 다시 만나기도 힘들 사람들과 함께 흘러가던 그 순간들이 간혹 떠오르곤 한다. 겁만큼이나 운도 많은 내게 횡단열차의 밤은 항상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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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박 34일,

11개의 도시와 바이칼호수까지!

10,000Km를 넘게 달렸던

2018년 스물셋 여름날의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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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프롤로그 : 좋아할 수 있는 일만 하며 살아가고 싶은데, 전공자도 전공자라서 러시아는 무서워요

02 동해항 : 배 타고 러시아 가는 건 영화에서나 봤지

03 블라디보스토크 1편 : 반가움에 '끝내주는 가게'를 소개해주겠다는 술 취한 현지인

04 블라디보스토크 2편 : 잘못 부른 택시가 폭우 속에 20분을 기다리다

05 울란우데 도시편 : 전 세계에서 가장 큰 42톤 짜리 레닌 두상이 있는 도시

06 울란우데 이볼긴스키 다짠편 : “다 끝내고 다시 시작할거야.” 사연 있는 현지인과 사찰을 걷다

07 울란우데 린포체 박샤 다짠편 : 부산(釜山) 사람은 평원에 약해

08 바이칼 호수 알혼섬 후지르마을 입성편 : 편도 6시간, 알 사람은 안다는 호수의 섬

09 바이칼 호수 북부 투어편 : 바다가 없으면 답답하다는 아빠를 호수에서 이해하다

10 바이칼 호수 알혼섬 카약 대장정 1편 : 수영은 못 해도 무작정 IN THE BAIKAL

11 바이칼 호수 알혼섬 카약 대장정 2편 : 카약도, 인생도 뒤집어지기는 쉽지 않아

12 이르쿠츠크 1편 : 유배 귀족들이 일군 시베리아의 파리에서 좋은 학생으로 인정받다

13 이르쿠츠크 2편 : 유노스찌(젊음)섬, 청춘은 그 자체로 노 프라블럼

14 시베리아 횡단열차 : 러시아 군인 앞에서 꺼낸 K-POP이 왜 하필 ‘이등병의 편지’였을까

15 노보시비르스크 : ‘노잼도시’에도 사람은 산다, 그래서 재밌다

16 예카테린부르크 1편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서 마이클 잭슨을 기념하다

17 예카테린부르크 2편 : 치킨텐더를 시켜서 닭날개를 받아도 맛있는 게 여행이다

18 카잔 1편 : 자퇴한다더니 교환학생의 도시를 예습해도 되는 걸까

19 카잔 2편 : 정교회 성당 옆 이슬람 사원에서 느껴보는 연방국의 넓이

20 니즈니노브고라드 : 러시아에서 조국을 수호한 날에 한국 예비군으로서 축하를 받은 사연

21 황금고리 1편 블라디미르 : 으슥한 식당 한 구석 오크통에서 꺼낸 꿀술, 메도부하

22 황금고리 2편 수즈달 : 1,000년 전 방어요새도 이제는 선베드 명당

23 모스크바 1편 : 러시아어 전공자면 성 바실리 성당 앞에서 울어도 주책은 아니지?

24 모스크바 2편 : 모스크바의 871번째 생일, “오늘 모스크바는 잠들지 않습니다.”

25 모스크바 3편 : 지방 사람은 서울 한 번도 결심이 필요한데, 모스크바는 어떻겠어

26 모스크바 4편 : DIY가 취미가 아니라면 마트료시카는 꼭 열어보자

27 상트페테르부르크 1편 :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28 상트페테르부르크 2편 : 책을 산 게 죄고, 읽는 게 벌이라던 <죄와 벌> 따라 ‘도망’가기

29 상트페테르부르크 3편 : 비행기 시간 남았으면 투어 시켜줄게, 마지막 택시기사님의 호의

30 에필로그 : 스물셋의 나름 괜찮았던 한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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