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불순물 19화

근육의 시, 땀의 서사

by 브레인캔디

1. 아침의 경계

첫 발걸음은 언제나 지도 바깥에서 시작된다. 창고 문턱에 서니 하얀 호흡이 새벽을 가르고 있었다. 손끝으로 만져본 공기의 결이 다르다. 책상 위 종이의 미세한 요철과는 달랐다. 쟁송레일 위로 굴러가는 팔레트 소리가 문장 대신 귓전에 새겨지는 아침, 내 피부는 미처 준비되지 않은 역학(力學) 교과서를 펼쳐든다.


오늘의 나는 지우개다. 상품 박스를 옮기며 스스로를 소모하는 각운(脚韻)의 반복. 허리의 굴곡마다 쏟아지는 땀방울들이 종이 위 잉크보다 무겁게 번진다. 손바닥의 지문이 닳아갈 때 비로소 깨닫는다. 평생 써온 '노동'이라는 단어가 이토록 가볍게 공중부양했음을.


2. 중력의 시학

열두 번째 상자를 들어 올릴 때쯤, 허리춤에서 울리는 신음이 시구(詩句)가 된다. "우주의 모든 무게는/인간의 척추로 흘러들어/별의 분출을 멈추게 한다." 무의식으로 흘러나온 이 외마디 시가 창고 천장에 맴돌다 빗장문 틈새로 새어나간다.


발바닥이 타는 오후 세 시. 전등 아래 맴도는 먼지 입자들이 내려앉는 속도가 문장의 리듬과 닮았다는 걸 발견한다. 상품 라벨의 바코드가 눈에 들어올 때마다 수평선 너머 사라진 책장들이 스쳐 지나간다. 손가락이 기억하는 키보드 각인이 이제는 작업장 장갑 안에서 새하얗게 빛난다.


3. 땀의 서사적 기능

다섯 시간째. 물통에 담긴 빛의 각도가 변한다.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염분 강이 이마의 골짜기를 넘어 침윤(浸潤)할 때, 땀은 신체 서사를 쓰는 잉크가 된다. 각 근육의 통증이 문단을 구분하고, 호흡의 고저(高低)가 문장부호를 찍는다.


창고 창으로 들어오는 석양이 팔레트 더미 사이로 쪼개진다. 금빛 틈새에 앉아 생수 병을 들이켜는 순간,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액체의 소리가 책장 넘기는 소리와 겹쳐진다. 이제야 알겠다. 손바닥에 박힌 물집들이 사실은 미출간 원고의 표점(標點)이었음을.


4. 근육의 언어학

일곱 시간. 허리 디스크가 경고등을 밝힌다. 무릎 관절에서 터져 나오는 경음(硬音)이 작업장을 채운다. "삐걱" 소리가 창고 전체를 휘감는 현장 언어학. 손등에 스친 상처에서 피어나는 붉은 어휘들이 이제는 내 유일한 수사학이다.

팔뚝 근육이 떨리는 리듬이 시의 운율로 다가온다. 들었다 놨다의 반복 동작 속에서 발견하는 새로운 문체. 중력과의 협상이 만들어내는 산문시. 박스 안 물건들의 무게가 페이지 넘버가 되어 등을 감싼다.


5. 종료벨의 수평선

마지막 팔레트가 트럭에 실리는 순간, 창고 바닥에 드리운 그림자가 책갈피를 꽂는다. 작업복 주머니에서 찾아낸 구겨진 메모지에 적힌 문구: "고통은 잉크통을 엎지르는 손이다." 종이 위에 떨어진 땀방울이 잃어버린 마침표를 대신한다.


퇴근길 발걸음이 지면을 두드리는 소리가 책 페이지 넘기는 소리와 교차한다. 노동의 하중이 어깨에 남긴 무게가 새로운 문학 이론집이 된다. 오늘의 상처들이 내일의 각주가 될 것임을, 타박상이 푸른 혈청으로 변해 문장의 모세혈관을 흐를 것임을.


6. 창고 유물론

샤워실 거울에 비친 몸이 낯설다. 붉은 자국들과 부푼 근육들이 새로 쓴 자서전의 초고 같다. 물줄기가 등에 흘러내릴 때, 머릿속에서 문장들이 역류하기 시작한다. "노동은 육체의 시적 허무다"라고 썼던 예전의 나를 창고 구석에 버려둔다.


베개에 얼굴을 묻는 순간, 온몸의 통증이 잠 못 드는 시(詩)가 된다. 내일 아침 다시 맞이할 중력의 서사시를 위해, 손바닥에 남은 물집을 어루만지며 약속한다. 이 고통이 결국 종이 위를 기어 다니던 문장들에게 날개를 달아줄 것이라고.


땀의 구문분석이 끝난 자리에서
종이백조들은 비로소 날갯짓을 시작하리라
맨발로 밟아온 콘크리트 바닥의 시운(詩韻)이
미간에 맺힌 염분 결정체로 승화할 때
우리는 비로소 모든 문학의
체액(體液)을 이해하게 되리라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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