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법적인 세습
현진권의 '술 권하는 사회'에서 제목을 빌려온 '재수 권하는 사회'라는 제목으로 수많은 언론사 기사와 사설, 그리고 사회 문제에 나름의 비판적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글을 쓰고 있다. 사교육에 들어가는 비용에 대한 통계와 재수생이 늘어나면서 발생하는 비용, 소비 위축 등 사회경제적 영향에 대한 심층기사도 해마다 나온다. 거기에 맞춰 정부는 '사교육 경감대책'이라고 자랑스럽게 대안을 제시한다. 그렇게 수 십 년이 지났지만, 사교육비는 해마다 최고치를 경신하고, 재필삼선(再必三選)을 넘어 N수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의대선발 인원이 늘어나면서 회사원까지 입시판에 '신분과 직업의 상승'을 노리고 뛰어들었다고 하니 'N 수 권하는 사회'라고 불러 마땅하다.
양질의 모의고사로 이름을 날리던 어느 학원은 이제 입시판을 씹어 먹을 기세로 확장을 하고 있다. 학생수가 줄어들어 학원 폐업이 늘어간다는 말과는 동떨어진 세상이다. 그리고 최근에 월 500만 원 상당의 기숙학원을 연다는 내용을 빗대어 '자녀를 재수시키는 부모는 징역 1년에 벌금 6000만 원을 선고받은 죄인'이라고 쓴 기사가 나왔다. 어디서부터 문제의 원인을 진단하고 해결책을 찾아야 할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깜깜한 형국이다.
'다시 한번'을 막아서는 안된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장려해야 한다. 그래야 사회의 개방성과 탄력성이 유지될 수 있다. 한 번의 실패로 평생 패배자로 낙인찍혀 사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결코 사회의 건건성과 건강함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재수, 삼수, 그리고 N 수는 막을 수 없는, 막아서도 안 되는 문제다. 하지만, 다시 한번이 뒤늦게 철이 든 사람, 노력했음에도 그에 걸맞은 결과를 받아 들지 못한 사람, 지금의 길이 나와 맞지 않아 다른 길을 가려고 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다시 한번'이 아니라 '신분'을 결정하는 수단으로 작용하는 '다시 한번'의 성격을 띠고 있으니 문제가 된다. 19년간 살아온 온 힘을 다해 대입을 치르고 다시 4~6년의 시간이 흐른 뒤 받아 든 졸업장은 사회에 나가서 죽을 때까지 그 사람의 명함이자 간판이며 든든한 배경으로 작용을 한다. 아무리 '실력위주의 사회'가 되었다고 혹은 되어 가는 중이라고 말하지만, 길을 가는 사람 열을 붙잡고 물어도 대학이 가진 힘, 졸업장이 가진 힘에 대해서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모임 자리에서 고등학교 동기가 'SKY는 졸업 이후 자기를 증명해야 할 일이 많지 않지만, 그 외의 종족은 끊임없이 시험받고 자기를 증명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말을 했다. 가장 좋은 대기업 중에 한 곳을 다니는 녀석은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는 S가 회사에 문제가 생기면 조용히 처리를 다한다.'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좋은 대학을 입학하기 위해 들인 노력과 그 사람의 실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운으로 SKY를 갈 수는 없다. 놀고 싶은 유혹을 이기고, 잠도 줄여가며 공부해서 받아 든 정당한 결과물이다. 거기에 맞는 인정과 응원,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그러니 우리는 재수, 삼수, N 수를 해서라도 이너서클에 들어가고자 한다. 그래서 재수를 권하는 사회는 멈출 수가 없다. 그런데, 계속 이렇게 달리면 모두가 탈이 날 것이 뻔하다. 결국 '다시 한번'이라는 아름답고 건강한 제도를 대입에 한정하지 않은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만 브레이크가 고장 나 버린 N 수 마차는 멈출 수 있다. 대학 입학과 졸업장이 아니어도 뒤늦게 철든 사람이 공부를 하고 실력을 쌓으면 SKY만큼의 인정과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저 그런 사람을 '별종' 혹은 '실수'라고 볼 것이 아니라 그가 거친 시련과 노력을 명문대와 똑같은 명함, 간판으로 인정해줘야 한다. 그런 문화가 생기지 않는다면, 10년 뒤에도 재수, 삼수, N 수를 하고 있을 것이고 학벌을 통한 신분과 부의 세습은 더욱 공고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