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부터 열까지
태어나서 부모와 공동체의 생활방식을 천천히 시간을 두고 배워가던 시절이 있었다. 엄마의 등에 매달려 엄마가 채집하는 나무 열매와 버섯을 보고, 아빠가 피하는 개구리와 나무는 어떤 것인지를 배웠다. 다 같이 사냥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조금씨기 부여받은 역할을 시행착오를 겪지만 하나씩 수행했다. 어깨너머로 배워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자신의 생각을 더해가며 하나의 완성된 인격체가 되고 훌륭한 사회구성원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물려받은 것을 넘겨주며 공동체의 연속성이 이어지도록 주어진 소명을 다했다.
하지만, 세상은 열매와 버섯, 칼과 화살로 이루어지던 세상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계라는 것이 등장했고 학문은 세분화되었다. 학문뿐 아니라 사회구성원으로 '생존'하기 위해 배워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졌다. 우리말도 익숙하지 않은 데 외국어를 배워야 하고, 매일 오는 학습지 선생님과 숙제 전쟁을 벌여야 한다. 내 주변에 것에 관심을 가질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채 '맞고, 틀림'만이 존재하는 결과가 점수로 나오는 세상을 먼저 접해야 한다. 태권도도 배워야 하고 원만한 친구관계를 위해 농구와 수영, 줄넘기도 배워야 한다. 집 근처 놀이터에서 아빠가 밀어주고 엄마가 손뼉 쳐주던 보조바퀴를 떼어 낸 두 발 자전거의 첫 번째 주행도 학원에서 정해진 절차를 통해 익힌다.
서점에 가면 초등학교 생활 잘하는 법부터 대학 생활 잘하는 법까지 엄청나게 많은 책이 있다. 이제는 회사 생활을 잘하는, 사교모임에 필요한 대화법이나 에티켓을 알려주는 책과 학원도 있다. 중학교를 꽤나 좋은 성적으로 졸업을 한 녀석이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첫 번째 지필고사를 맞이하면서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시험 범위는 나왔는데요, 시험공부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무슨 말이야?'
'중학교 때는 학원에 가서, 시험 범위만 이야기하면 기타 과목까지 내용 설명에 복습까지 시켜주고, 문제자료까지 바로 나왔거든요. 근데 고등학생 되니 그런 학원도 없고,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스스로 생각하고 시행착오를 겪을 여유를 주지 않고 '어서 빨리'가 미덕인 세계관이 우리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빠르고 강한 놈은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루저'라는 이름으로 도태되고, 또다시 더 빠르게 변하는 세상은 승자와 패자를 더욱 명확하게 구분했고, 패자는 이제 자식에게까지 '흙수저'라는 낙인을 찍어 세상에 내보야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러니 생각이 아닌 '방법'에만 몰두한 배움 아닌 배움만을 쫓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걸 쫓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세상과 세상의 규칙이 더욱 거기에 매몰되게 만든다. 실수를 통해 배우고 성장한다고 유명하신 분들이 말을 하고, 두려워하지 말고 침대에 누워있지만 말고 뭐든 도전하라고 말을 하지만, 우리 사회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실수에 가혹하다. 뒤집기를 실패해도 좋아해 주고 일어서서 몇 발작 걷지 않고 넘어져도 감동해서 눈물까지 흘리던 세상이, 어느 순간 너는 왜 점수가 이 모양이냐고 따지고 앉은 자세가 왜 그러냐고 타박한다.
생각과 고민에서 나온 필요에 의한 배움이 아닌 수동적인 배움의 연속. 생각은 뒷 전이고 기술과 방법만을 배워 대응만을 위한 배움의 연속. 앞으로 더 많은 'oo 하는 법'이란 글과 강의를 만날 수밖에 없다. 휴대폰 살 때 호구되지 않는 법부터 코스트코에서 현명하게 쇼핑하는 법까지. 필요한 것이라면 더한 것도 배워야 한다. 하지만, 그 배움에 '나'와 '나의 의지' 그리고 '나의 생각'이 들어 있는지를 고민하지 않는다면 계속해서 수동적인 위치에 놓일 수밖에 없다. 세상이 복잡해지고 직업이 분화되었으니 모르는 분야는 더 많아지는 것은 자연의 순리에 가깝다. 허나, 자연의 순리에 법칙이 있고 신의 섭리가 깃들여 있는 것처럼 복잡한 세상에서 무한 배움도 스스로 정한 법칙과 순리가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