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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애진 Aug 20. 2020

울음이 뇌리를 스칠 때

'죽고 싶다'와 '살기 싫다'









자살도 자연선택의 일종일까.





문득 이 물음이 뇌리를 스쳤지만 나는 자살을 부추기는 유전자가 실제로 있다든지, 결국 자살행위는 도태라든지, 여기에 긍정하는 대답이 자살의 변명이 될 수 있다든지, 질문이 함의할 수 있는 그 어떤 과학적, 윤리적, 철학적 부산물에도 관심이 없었다. 순간 '물음'이 '울음'으로 읽혔을 뿐이다. 갑자기 벼락이라도 맞은 듯 넘실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해 대학 동기에게 연락해 물어봤다.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이런저런 말이 오고가다 자살률을 유의미한 통계자료로 비교할 수 있게 된 기간과, 여생이 지나치게 많이 남은 시점에서 인간이 갖가지 종류의 스트레스에 시달릴 확률이 높아진 기간이 인류 역사에 비해 너무 짧은 것이 아니겠냐는 말로 대충 끝을 냈다. 웬만한 상황에선 늘 큰 힘을 발휘하는 불가지론. 덕분에 난파선마냥 표류하던 내 질문은 곧 정박했다.



그러고보니 나는 심정이 복잡해질 때마다 누군가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던지는 버릇이 있었다. 그리고 대개 제대로 된 답변이 돌아오는지는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돌아오는 말을 흘려 들었다는 뜻이 아니다. 어떤 대답이 돌아와도 좋았다는 뜻이다. 그냥 서로 되묻고 대답하고 꼬리를 무는 과정이 좋았다. 그러다 보면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에서 떠돌던 부유물들은 차차 가라앉았다. 그렇게 토론이랍시고 이야기판을 벌인 적이 많았지만 사실 분석력, 통찰력 같은 것과 스스로 거리가 멀다는 걸 깨달은 지 오래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정리 없이 늘어놓는 것이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나만의 회피법이었나, 싶다. 일부러 내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려버리는.



자살도 자연선택의 일종일까, 답없는 이 질문은 그저 울음이 내 뇌리를 스쳤다는 신호다. 내게 울음은 이제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라기보다 주기적으로 치밀어오르는 슬픔이나 절망에 가깝다. 살기 싫다는 생각이 죽고 싶다는 생각과 같은 걸까, 많은 시간을 고민한 끝에 이 둘은 결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 자기혐오와 자기애가 사실 맞닿아있다는 깨달음의 연장선이었다. 


1. 살면서 '죽고 싶은' 적은 없었다. 들추어보면 '(이렇게) 살기는 싫다'는 어리광이었다.

2. '난 왜 이것밖에 안 되지' 수없이 자멸했지만 실은 '이것보다 나을 자격 있는데'가 전제조건이었다.



인류의 역사는 우리가 누리는 자유의 범위와 주체를 모두 확장시키는 방향으로 발전되어 왔다고 들었다. 왕에서 귀족으로, 부르주아로, 시민 모두에게로……. 하지만 내게 자유라는 단어는 언제부터인가 물질적인 것들과 억척스레 결합되어 있다. 돈으로 할 수 있는 것들, 돈때문에 해야만 하는 것들, 돈이 없어 할 수 없는 것들, 돈을 위해 할 수 있거나 없는 것들. 사람마다 다른 것들. 무엇보다도 돈에 멱살잡혀 끌려다니고 마는 내 감정들. 그 아래 몸을 누일 천장이 없고 당장 다음 끼니가 막막한 것도 아닌데 무슨 배부른 소리일까? 그렇기에 더 기가 찬다. 



쓸데없는 질문들이 다 무슨 소용인지. 내려놓고 훨훨 떠난 영혼이 행복해졌다면, 행복해진다면. 행복이라고 해봐야 고통의 부재, 그게 다라고 못박아버리면 그만이다. 부재를 찾아나선 이들은 차라리 용감하다. 울음이 찾아오는 순간들마다 나는 밤새 목줄에 묶여 울다가 해가 뜨고 줄이 풀려도 나무 근처를 감히 떠나지 못하는 개처럼 무기력할 뿐이다. '죽고 싶다'와 다르게 '살기 싫다'엔 의지조차 없다. 벗어나지도 못할 거면서 쓸데없는 질문들로 슬픔과 절망을 회피해가며 나를 기만하고 있다. 언제쯤 내가 내 어리광을 달래고 전제조건을 채우기 위해 달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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